제31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142

사람이 만들어온 역사, 사람이 밝혀내는 역사
-허진모의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1]을 읽고 

박경옥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중요한 키워드를 몇 가지만 뽑으라면, 어떤 것이 주로 뽑힐까?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1]은 제목처럼 그 중에서 전쟁과 문명이라는 키워드를 뽑았다. 그리고 전쟁과 문명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항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여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사의 굵직한 흐름은 포착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그 이상의 이야기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말은 아주 자주 회자되고는 한다. 어쩌면 역사를 언급하는 격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승리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기록만을 남기고, 후대 사람은 그 과정에서 왜곡된 기록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그러니 역사 기록이란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기 일쑤다.


하지만 막상 역사학에서는 저 말은 틀린 명제에 가깝다. 역사 연구란 바로 역사는 마냥 승리자만의 기록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리고 역사학이란 그 명제가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그런 사례를 재미있고 극적으로 여럿 소개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례는 단연 카데시 전투이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에서 많은 유명한 기념물을 남긴 파라오이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아부심벨 대신전에는 람세스 2세가 카데시에서 적군을 상대로 종횡무진 활약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장대한 벽화와 함께 대대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이 말하기를, 3천년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카데시에서 람세스 2세의 이집트군이 대승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히타이트는 19세기 후반이 되도록 존재조차 잊힌 문명이었고, 교차검증할 자료가 없었기에 남은 기록만을 신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히타이트의 기록과 두 나라의 조약문 등이 발굴되면서, 카데시에서 히타이트가 승리했거나 적어도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한 쪽의 일방적인 기록만 남았다가, 뒤늦게나마 역사 연구를 통해 실제 상황을 복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전쟁과 문명에 대한 기존 기록을 무턱대고 믿지 않는 서술이 꽤 비중 있게 나온다. 기존 기록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본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거기에는 전쟁 규모가 과연 실제로는 어느 정도였을지, 전쟁에 관련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온당할지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된다.


예를 들면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현명하고 유능한 지도자처럼 알려졌지만 그리스 중에서도 아테네 입장에서나 그랬을 뿐, 그리스의 다른 지역 입장에서는 그리스의 공동 공금을 아테네만을 위해서 마구 쓴 것으로 여겨졌을 거라고 쓴 대목을 들 수 있겠다. 유명한 기록을 남긴 주체와 다른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옛날 역사 기록의 표면에는 없는 수많은 내용을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고, 그것을 역사 연구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점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의 입장을 두드러지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전쟁과 문명 스케일에서 이야기할 때에는 사람의 머릿수만을 주목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전투에서 적군을 많이 죽일수록 훌륭한 승전이고, 특정 문명권에 속한 인구가 많을수록 그 문명이 발전했다는 식이다. 따지고 보면 역사가 오래 되고 옛날에 강대국이었을수록 훌륭한 나라라고 여겨서, 과거 기록을 날조하며 자국이 옛 강대국의 후예라고 우기는 움직임이 꾸준히 나오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을 듯하다.


하지만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1]은 사람의 입장에 초점을 맞춘다. 전쟁에 대해 논할 때에는 사람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기로 했는지, 그리고 전쟁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전술, 정세 판도 등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바라본다. 문명사를 다룰 때에는 그 문명이 발전시킨 문화, 문명의 세력권 등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우선 살펴본다. 나아가 훌륭한 나라가 되는 조건이란 옛 강대국의 후예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고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 또한 아울러 강조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전쟁과 문명의 이야기는 사람의 머릿수가 많을수록 훌륭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의 입장을 전쟁 및 문명의 기록을 통해 추론하고 분석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런 점은 중국 역사의 춘추전국시대를 다룰 때 특히 두드러진다.
춘추전국시대는 일반적으로 제자백가 사상의 배경이나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는 위태로운 각축장 정도로만 묘사될 때가 많다. 그에 비해 이 책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 및 당대인의 입장에서 개별적인 제자백가 사상이 각각 어떻게 여겨졌을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보다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끌어준다.


후대의 사람은 옛 역사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기록 중 명백히 사실이 아닌 것은 연구를 통해서 조금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과정을 바라본다면, 표면적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수많은 내용에 생각이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역사는 단순한 옛날 기록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온 이야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밝혀내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나아가 더욱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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