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24회 - " 교실에서 김기덕을 이야기하다 "

영광도서 0 243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 범죄심리학자의 분석에 등장한 용어가 아니다. 기발하게도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감독 입에서 나왔다. ‘괴물’은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겸손을 감안하면 ‘소외감을 딛고 자란 괴짜’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열등감은 없다. 표정엔 자신감이 넘쳐난다. 인터뷰 화면의 배경음악으론 스티브 잡스가 좋아했다는 ‘The times they are a-changing’이 어울릴 성싶다. 흔히 ‘지금의 패자가 훗날 승자가 되리’로 번역하는 밥 딜런의 노래다. 황금사자상을 받는 순간 떠오른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청계천에서 무거운 구리 박스를 들고 다니던 15살의 내 모습’이란 답이 나왔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김기덕 감독에게 과거(고난)는 현재(영광)의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형 배급사의 상영 독점에 대해선 예민한 모습을 보였다. ‘큰 극장에서 편하게 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출연배우 이정진의 말에 ‘솔직히 편하게 볼 영화는 아니잖습니까’라며 토를 다는 기자는 없었다. 축제기간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적성'순이다
성적으로 세우면 한 줄이지만 적성으로 세우면 여러 줄


 박태환의 메달이나 기성용의 CF를 보고 어린 자식을 수영장, 혹은 축구장에 보내는 상상은 한다. 하지만 김 감독의 성공담을 듣고 자식을 청계천 공구상으로 보내려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김 감독의 사례는 토론수업하기 딱 좋은 소재다. 19금 영화라 교실에서 상영할 순 없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청소년들이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관찰, 통찰, 성찰해볼 만한 이력이다. 그는 공부를 못해서, 아니면 공부가 싫어서 교실을 벗어난 게 아니다. 오로지 가난해서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공부를 멈춘 건 아니다. 무거운 노동을 통해 국어와 수학, 음악과 미술, 그리고 사회를 터득했다.

 무슨 대학 나왔느냐고 물으면 그는 웃으며 해병대 나왔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는 거기서도 인생의 학점을 이수했다. 그리고 홀연히 그림공부하러 프랑스행 비행기를 탔다. 아무나 하긴 힘든 용감한 행동이다. 그는 ‘움직이는 그림’에서 절절한 재미를 느꼈고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을 직접 만드는 데 도전했다. 그가 자신 있는 건 ‘음침한’ 이야기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겪고 느낀 이야기를 하니 불편하긴 하지만 진심이 묻어난다. 인간은 천사와 동물의 중간자쯤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자, 어떤가. 이쯤 해서 세 가지만 요약하자. 우선 가난은 죄가 아니다. 둘째, 절박함 속에서 예술은 꽃핀다. 셋째, 공부에 때가 있는 건 아니다.

 학생들에게 인생을 공부하러 당장 짐을 싸라고 권할 필요는 없다. 김기덕에게 가난은 걸림돌이자 디딤돌이었다. 아니 주춧돌이었을지도 모른다. 청소년들에게 빈곤에 해당할 만한 압박은 무엇일까. 아마도 성적일 것이다. 성공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적성’순이라는 걸 김 감독은 증언한다. 교사는 지금부터라도 성적순으로 줄 세우지 말고 각자 적성을 찾을 수 있도록 눈을 씻고 팔을 걷고 도와야 한다. 내가 교장이라면 수업시간을 확 줄이고 특활시간을 쫙 늘리겠다. 더디게나마 대학입시도 그런 방향으로 바뀌고 있으니 호재 아닌가. 성적으로 세우면 한 줄이면 되지만 적성으로 세우면 여러 줄이 된다. 그 속에 미래의 김기덕도 있다.

 불행한 교실엔 무시와 질시가 있다. 공부 못한다고 무시당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은 질시의 대상이 된다. 성적으로 올가미를 씌우는 어머니를 소년은 살해했다. 그의 옥중편지를 신문에서 읽었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가라 한다.” ‘공부해라’가 아니고 ‘1등 해라’가 문제였다.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 다른 걸로도 1등할 수 있는데. 그는 지나치게 사랑받은 걸까, 아니면 버림받은 걸까.

 오늘의 숙어는 낭중지추(囊中之錐). 날 선 송곳은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난다. 다만 어떤 주머니 속에 들어가느냐가 중요하다. 자기에게 맞는 주머니를 골라야 한다. 부모와 교사는 가급적 많은 주머니를 보여주고 찾아주어야 한다. 작고 어두운 주머니 속에서도 송곳은 얼마든지 존재감을 발한다.


중앙일보[2012.09.13. 삶의 향기-주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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