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피니언 칼럼

*제108회 - " 잎이 모두 지니 단단해지는 겨울나무처럼 "

영광도서 0 235


‘흩날리던 나뭇잎이 붉은 빛마저 허공에 날리고, 한 잎 두 잎 낙엽 되어 길 위에 눕습니다. 지상에서의 모든 짐을 벗어버린 한 잎의 낙엽이 가늣한 실바람에 푸르르 날립니다. 한없이 가벼워진 나뭇잎이 사람의 마을에 곰비임비 쌓입니다. 비바람 맞으며 모질게 지상의 양식을 지어낸 노동의 무게를 다 내려놓고, 나뭇잎은 흙이 되어 자신을 키워준 땅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칩니다. 길 위에 뒹구는 낙엽이 오가는 사람의 무심한 발길에 이리저리 차입니다.’

 나무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고규홍 천리포수목원 이사가 어제 자신이 운영하는 솔숲닷컴(solsup.com)의 ‘나무 생각’ 코너에 올린 글이다. 벌써 12월이구나 생각하며 출근한 참에 e메일로 갓 배달된 고씨의 글을 읽었다. 창밖을 보니 얼마 전까지 은행잎이 노랗게 설치던 나뭇가지들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내가 무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정신줄 놓고 따로 매달릴 중요한 일이 과연 얼마나 많았기에.

 최근 주말마다 경조사 챙길 일이 생기는 편이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번갈아 찾는 날은 두 곳의 상반된 분위기와 표정들을 실감한다. 생로병사와 관혼상제가 맞물려 돌아가는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다. 장례식만 해도 예전엔 친구 부모상이 대세였는데 요즘은 본인상을 몇 차례 다녀왔다. 나이 들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풍경 변화이리라. 지난 주말의 두 곳도 본인상이었다.

 서울 대형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새삼 느끼는 것은, 문상객들이 조심하고 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차를 빼고 넣을 때도 서로 양보한다. 착하고 순해진다. 병원을 떠나 거리에 나서면 함부로 경적을 울리고 추월할망정, 여기서만큼은 다르다. 점잖은 사람도 들어가기만 하면 성마르고 사나워진다는 국회와는 정반대다. 인생의 결정적 장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차를 방금 목격하고 나온 덕분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상은 우리들 삶에서 일종의 과속방지턱 역할을 하는 셈이다. 자신을 찬찬히 돌아보는 전신거울 구실을 하며, 태어날 때 집행이 유예된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라는 권고이기도 하다.

 12월 초입에 조락(凋落)과 소멸을 떠올리는 것은 한 해 마지막 달만큼은 내면을 갈무리하는 시간으로 삼았으면 해서다. 확대와 성장에 분주하던 나이테 간격을 촘촘히 좁히며 스스로를 성찰하기 좋은 때다. 외면하고 무심했던 것들에 눈길이 닿을 것이다. 이재무 시인은 ‘겨울나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단단한 겨울나무’

[2013.12.3 중앙일보 분수대 -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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