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환의 삶과 생각


 

김윤환
(주)영광도서 대표이사 | 경영학 박사
yhkim@ykbook.com
[약력] 경남 함안 대산 구혜 출생(1949).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졸업, 부산외국어대학교 경영학석사, 부산대학교 국제학석사, 동아대학교대학원 경영학박사. ‘87 JCI부산시지구 회장, '88한국청년회의소중앙부회장, '89부산시체육회이사, 한국청년회의소 연수원 교수부장, (사)목요학술회 부회장, '06국제신문 부사장, 부산고등법원민사 조정위원, 부산문화재단 이사, (사)한국마케팅관리학회 부회장, 2014부산ITU전권회의범시민지원협의회 부회장, 2014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범시민지원협의회 부회장, 부산광역시 새마을회 회장, 부산새마을신문 발행·편집인 등 역임...< 더보기 >

*제53회 - " 책과의 섭섭한 이별 "

영광도서 0 350
섭섭하지 않은 이별, 안타깝지 않은 이별, 서럽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으랴. 애증이 켜켜에 쌓인 이별은 더욱 그렇다. 이별을 위로하려고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경구도 있다. ‘우리가 만날 때 헤어질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란 한용운의 시구로 위안삼기도 한다.

사람과의 이별 못지않게 섭섭한 것이 책과의 이별이다. 이사를 다닐 때마다 섭섭한 이별이 이루어진다. 책에 대한 애착이 큰 사람일수록 이별의 시간이 길다. 애서가들의 사연은 참으로 애틋하다.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를 해서 헌책방을 들러 책을 구입하고, 교통비를 털어 사고 싶은 책을 사서 콧노래 부르며 집으로 온다. 점심값을 아껴 책을 산 슬픈 사연도 있다. 어쩌다 저자 친필 사인이 된 책을 손에 넣을 때는 성취감이 하늘을 찌른다. 오래된 풍경화 같지만 지금도 그런 정신이 유효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넓은 서재를 갖는 것이다. 영혼의 자식들이 편한 자리를 차지하고 편한 숨을 쉬고 여유롭게 오가며 그들을 만지고 드나들 수 있는 서재가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꿈을 위축시킨다. 사람 들어앉을 자리 마련하느라 급급해 넉넉한 서재는 꿈이다. 안방과 베란다에 책을 분산시키고 더러는 거실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베란다에 내몰린 책, 짐짝처럼 구석에 쌓인 책은, 잊혀진 여인처럼 손길에서 멀어지고 애정도 식는다.

이삿짐을 쌀 때마다 고민과 한숨이 깊다. 가슴으로 때를 묻힌 책이건만 이별을 생각한다. 부피는 어찌 그리 많고 무게 또한 심상치 않다. 이삿짐센터 인부들이 싫어한다. 밥을 굶어가며 내 영혼의 울타리에 들어온 것들, 밤 새워 가슴을 울린 것들, 거기 담긴 한 구절이 열정을 솟구치게 하고 생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운이 좋아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면 의붓자식 챙기듯 챙겨갈 수 있지만 고만고만한 평수로 이사갈 때면 조금씩 추려낸다. ‘모든 것은 번뇌덩어리다. 버려라, 버려라’라고 혼자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노학자들은 평생의 도반인 책들을 공공 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한다. 학자에게 책은 평생 모은 재산과 같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다. 필요로 하는 곳에 임자를 찾아주는 아름다운 보살행이다.

애서가들의 집착은 가히 병적이다. 귀금속을 잃어버리면 분한 생각이 오래가지 않지만 책을 잃어버리면 정신의 혼돈이 온다. 알알함을 삭이려고 무진 애를 쓴다. 저자의 서명이 들어있고 촘촘하게 밑줄이 쳐진 책을 잃어버리면 패닉현상마저 느낀다. 실연의 상처만큼 아픔이 깊다.

이런 정신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책을, 대량 생산된 공산품의 일부라고 여기는 개념 때문이다.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이 하루는 제자 고봉에게 물었다.

“고봉아, 화과원(華果院 : 용성스님이 함양 백운산에 세운 농장)의 도리원(桃梨園:복숭아밭) 소식을 한 마디 일러라.”

“화과원에 도리가 만발하니, 그대로가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용성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네, 이놈! 뭐가 어쩌고 어째! 이놈이 공부깨나 해서 안목이 열렸는가 했더니만, 순전히 밥이나 축내는 밥도둑놈이 아닌가!”

하고 마구 때렸다. 고봉이 생각하기를, ‘내가 혹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했나?’하고 스스로에 대해 의심했다. 그래서 곧 스승에게 여쭈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화과원에 도리가 만발하니, 그대로 화장세계로구나!”

화과원의 도리원 소식, 즉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스승과 제자가 한 말은 같다. 어디에 차이점이 있을까. 이 문답에서 제자는 공부의 단계가 이미 나름대로 안목을 갖추었지만, 스승이 던진 낚시밥을 냉큼 물고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스승의 시험에 걸려 순간적으로 확신을 잃은 것이다.

책과의 이별을 생각하며 용성스님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이미 영혼에 자양을 듬뿍 준 책들, 그들과의 이별을 서러워하지 말자. 그러나 책을 버리되 아끼는 정신만은 버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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