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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 리뷰

고전의 대문을 여니 내 인생의 대궐이 보인다!"

영광도서 0 854

서명 : 고전의 대문 -사서편- 
저자 : 박재희 
정가 : 14,800원 
출판사 : 김영사


동양고전의 전도사 박재희 교수의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1탄! 
마음, 성공, 공부, 부, 미래… 인생에서 꼭 마주치는 질문들에 대한 동양고전의 답!

동양고전 열풍을 일으킨 박재희 교수의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1탄! 왜 유학의 창시자 공자는 돈을 벌기 위해 마부의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는가? 어떻게 우리는 기쁨과 슬픔이 넘치지 않고 감정 표현이 적중하는 마음의 중용을 실현할 수 있는가? 21세기 공자주의와 자본주의의 시너지는 어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는가? 마음, 성공, 공부, 부, 미래…… 인생에서 꼭 마주치는 질문들에 대한 《대학》에서 《중용》까지 동양고전의 답!

고전의 대문을 여니 내 인생의 대궐이 보인다!
마음, 성공, 공부, 부, 미래… 인생에서 꼭 마주치는 질문들에 대한 동양고전의 답!

동양고전의 전도사 박재희 교수의 <고전의 대궐 짓기 프로젝트> 1탄!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한병철 교수의 저서 《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인간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자발적 피로를 유발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 《고전의 대문》의 저자 박재희 교수는 지난 2년 동안 휴식 기간을 가지면서 뉴욕과 런던에서 머물렀다. 버지니아주립대학 출신 증권사 애널리스트 라저는 비록 1억 이상의 연봉을 받지만 대학 때 빌린 학자금과 엄청난 월세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스타벅스 커피와 베이글을 손에 들고 거의 24시간 근무를 버티는 라저의 꿈은 회사에서 얻은 정보로 투자를 해서 한몫 잡고 업계를 뜨는 것이지만, 그런 꿈이 이루어지는 월스트리트의 젊은이들은 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번화하고 발전했다는 도시 어디에도 흥〔興〕이 넘쳐나지 않는다. 
이 책은 흥이 넘쳐나는 고전의 대궐을 짓기 위한 프로젝트 1탄이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사서四書 고전이 확립된 시기는 당송 문명의 전환기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불교가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불교가 성장하면서 절이 커지고, 승려의 사치가 심해지고, 부처에 금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사원은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되고 승려들은 세속의 부와 권력을 함께 얻었다. 이처럼 중국이 불교에 의해 암흑시대를 겪고 있을 때 그 시대를 구원한 원탁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이건 아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에게는 밥도 제대로 안 차려드리면서 절에 가서 보시하고 극락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제대로 된 인간의 모습인가? 우리는 나서서 불합리한 세상을 바로잡고 인간 중심의 세상을 다시 복구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원탁의 기사들이 송조육현宋朝六賢, 즉 주렴계, 장횡거, 소강절, 정명도, 정이천, 주자였다. 서양의 르네상스의 정신이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이었다면, 송나라 시기 원탁의 기사들이 새롭게 인간의 재발견을 시도하고 체계적인 이론을 확립한 신유교는 동양문명의 르네상스였다. 적어도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며, 어떤 신과 절대자도 인간을 그들의 편의에 의해 이용할 수 없다는 자각이었다. 당신은 인생의 르네상스를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불합리한 나, 부숴야 할 나, 소외된 나를 부활시켜 새로운 나를 만드는 르네상스를 꿈꾼다면 동양고전의 대궐에서 답을 찾아보라!

부모의 사랑에서 기업의 성공까지,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사서 중 첫 번째 고전인 《대학》은 신유교 르네상스를 이끈 지식 근로자knowledge worker인 사대부들의 자기 능력 계발과 관계 경영을 위한 리더십 교과서다. 대학은 3강령 8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강령 중 첫 번째는 “명덕明德, 내 안에 위대한 가능성을 끌어내라”이다. 덕을 밝히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조목은 격물格物이다. 격물의 격格은 ‘다가가다’는 뜻이다. 물物은 존재를 뜻한다. 세상에 있는 어떤 존재든 그 실체를 규명하려면 먼저 다가가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격물부터 해야 한다. 두 번째 조목인 치지致知는 극진할 치致에 지혜 지知,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극치에 이르게 하라는 것이다. 격물格物은 현장에 대한 접근이고 치지致知는 집중concentration이다. 기업의 격물치지는 고객에게 다가가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고민하고, 고객의 생각에 맞춰 가장 합당한 물건을 생산하는 것이다. 자식에게 다가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듣고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부모의 격물치지다. 격물치지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바둑 대결은 결국 격물치지가 관건이었다. 컴퓨터와 인간의 몰입과 격물치지는 누가 우세한가? 격물치지의 몰입을 통해 인간을 능가하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내 영혼의 행복을 위한 공부, 《논어》의 위기지학爲己之學
식물학자들은 역경 속에 피는 꽃에 앙스트블뤼테angstblut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독일어로 앙스트angst는 ‘불안, 초조’를 뜻하는 말이고 블뤼테blute는 ‘꽃을 피운다’는 말이다. 모든 존재는 가장 불안하고 힘들 때angst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워낸다blute. 공자의 아버지는 공자가 세 살쯤 됐을 때 죽었고 공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사마천은 공자의 어린 시절을 ‘빈천貧賤’이라고 표현했고, 공자 역시 《논어》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빈천貧賤’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얼마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회고하고 있다. 공자에게는 이런 절박감이 있었고 이 절박감이 공자와 《논어》를 만들어냈다. 《논어》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우고 배운 것을 익히고 실천하니 기쁘지 아니한가? 

군자는 배우는 사람이고, 날마다 새로운 배움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는 사람이다. 이른바 학습형 인간Homo Academicus이다. 학습은 지식의 축적뿐만이 아니라 축적된 지식이 삶에 반영되는 것이다. 구분하자면 지성적 삶이 아닌 덕성적 삶의 추구이다. 습習은 우羽와 백白의 합자로, 갓 태어난〔白〕 새가 쉼 없는 날갯짓〔羽〕을 통해 날아오름〔飛〕을 실현하는 것이다. 73년의 인생을 살다 간 공자의 정체성은 학습하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공자가 생각한 학습,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군자의 학습 목표는 내 영성의 만족을 위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爲己之學〕. 남에게 과시하거나 군림하기 위한 학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爲人之學〕.

위기지학爲己之學.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맞춘 공부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공부다. 노인이 되어 스페인어를 배우거나 예술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공부의 열정과 노력을 다하는 분들을 보면 위기지학의 진면목이 보인다. 그분들에게 공부는 성공의 도구가 아닌 행복 그 자체다. 어디에 쓸 것인가가 공부의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 동기를 지나면 배움 자체에서 행복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격증을 따고, 졸업 증서를 통해 얻는 공부의 기쁨은 잠깐이고 공허하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그 인정에 내 영혼의 만족감이 결여되어 있다면 만족감을 지속시켜줄 수 없다.

공자주의와 자본주의의 만남이 가리키는 새로운 세계
공자는 휴머니스트다. 물질은 배격하고 인간을 중시한 인간 중심의 철학자다. 공자가 인간만 위하고 물질은 묻지 않았다면 현실과 공자는 절대 만날 수 없는 것일까? 과연 공자가 물질을 싫어했을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부이가구야富而可求也면 수집편지사雖執鞭之士라도 오역위지吾亦爲之라.
부를 얻는 것이 목표라면 비록 마부의 천한 직업도 나는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유교에서는 부자가 되고 귀한 자가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유교적 가치에서 볼 때 부귀는 인간이 추구하는 당연한 가치다. 유교와 자본주의는 서로 만나는 점이 많다. 그래서 요즘에는 유교 자본주의confutalism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유교를 뜻하는 컨퓨셔니즘confucianism과 자본주의를 뜻하는 캐피털리즘capitalism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역사상 가장 경쟁이 치열했던 시대였다. 중국 역사가 곽말약은 이 시대를 평가하기를 “시대는 그토록 암울했고, 민중은 그토록 고통스러웠고, 정치는 그토록 혼란했지만, 오히려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대안이 쏟아져 나온 시대다”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 개방의 시작을 알리면서 춘추전국시대를 벤치마킹할 가장 중요한 시대라고 정의했다. 역동성, 다양성, 그리고 실제성을 강조하는 개혁 개방의 이념이 춘추전국시대의 화두였기 때문이다. “백화제방百花齊放! 수없이 많은 꽃들이여, 함께 피어라! 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틀에서 벗어나 민생을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라!” 덩샤오핑에게 춘추전국시대는 그의 개혁 개방과 가장 부합하는 매력적인 역동의 시대였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탄생한 공자와 맹자의 유교주의는 다양성이 강조되고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 중요한 구동축이 될 수 있다.

마음을 성찰한 결과에 따라 행동하라, 《맹자》의 부동심不動心
이익보다 의로움을 강조했던 맹자의 논조는 당시 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맹자는 어디에서도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만약 당대의 이익에 영합했다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으로 되었을지는 몰라도 오늘날 불멸의 철학자로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맹자는 대장부를 정의하면서 의로움을 굳게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부동심은 고집과 편견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결과에 충실한 것이다. 자기 성찰의 결과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스스로 반성해서 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비록 별 볼 일 없는 옷을 입고 있는 노숙자, 길거리의 거지에게라도 무릎 꿇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반성해서 옳다고 생각하면, 비록 내 앞에 천만 명이 달려들더라도 나는 그 천만 명을 향해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리라.

이런 부동심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대장부들의 다양한 삶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면암 최익현은 경복궁 앞에 가서 도끼를 내려놓고 왕과 정면 대결 하는 지부상소持斧上訴를 했다. “왕께서 하는 일이 잘못됐으니 그만두든지 아니면 도끼로 나를 치십시오.” 아마도 가장 무서운 일인 시위의 기록일 것이다. 부동심은 우리 민족의 유전자 속에 면면히 흐르는 인문학적 정신이기도 하다. 

정확한 자리에 적중하는 감정 표현의 미학, 《중용》의 중화中和
중용을 잘못 이해하면 A와 B의 가운데라고 생각하기 쉽다. 중간과 중용은 다르다. 중용은 살아 있는 영역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중용은 기계적이거나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생동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상황을 읽어내고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유연성flexibility의 답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보면, 《중용》이라는 책과 중용이라는 삶의 방식이 잘 이해될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감정의 중용이다.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등은 늘 우리의 일상에서 변하고 있다. 사랑하다가 미워지기도 하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감정들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그렇다고 감정이 없는 것이 중용은 아니다. 기뻐도 기뻐하지 않고, 슬퍼도 슬퍼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반중용적이다. 기쁨, 슬픔, 분노, 이 감정들을 어떻게 틀어막느냐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적시적절하게 표출하느냐〔皆中節〕, 그리하여 그 마디마디에 모두가 적중的中할 때 진정 감정의 중용인 중화中和가 이루어진다.
중용의 삶은 내 안에 있는 우주의 위대한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묵묵히 중용의 길을 실천할 뿐 소인처럼 요행을 기다리며 동분서주하며 살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중용적 삶의 근간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중용의 도를 쫓아 행하다가 중간에 가다가 그 길에서 망가지고 무너지더라도 나는 쉬지 않고 가리라. 중용의 도를 택하여 의지하며 살다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누구 하나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해도 한 점 후회도 하지 않고 살리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우주의 길이 중용의 균형으로 열려 있듯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중용의 평형으로 뻗어 있다.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이며,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우주와 한 호흡으로 사는 중용적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포기하지 않고, 그 넓고 편안한 길을 걸어갈 때 인간은 어느덧 우주와 하나가 되는 희열을 맛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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