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8753

내 인생의 가을을 사랑하기 위하여 -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입니다>을 읽고 -

 

                                                                                                                                             견선희

 

시간이란 참 오묘하다. 어렸을 적에는 그리도 느리게 가서 어떻게든 빨리 어른이 되고픈 마음뿐이었는데, 이제는 어떻게든 오래오래 내 곁에 붙잡아두고 싶어도 어느새 저만큼 야속하게 달아나 버리기 일쑤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다. 나는 교통사고로 대퇴부에 쇠줄을 삽입하는 수술을 받고 한 달째 병원에 입원해 있는 중이다. 병원에서의 매일은 너무나 무심히 느릿느릿 흘러가서, 바깥세상과는 다른 시계가 작동하는 것 같다. 이 순간, 왜 하필 내게 이 일이 일어났는지를 곱씹어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신 이 시간을 소중히 쓰기로 다짐해본다. 이렇게 내게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졌을 때가 가장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일 거라고 믿는다. 

 

책을 읽으면서 다리의 통증을 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오늘은 입원실의 삭막한 풍경마저 따스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책 한 권을 만났다. 책의 제목부터가 마음 깊숙한 곳을 가만히 어루만져 준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 그렇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고 우리는 이 순간부터 늙어가고 있는 것이니,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일 것이다. 저자가 의료봉사를 위해 30년 넘게 찾고 있는 네팔에서는 오래전부터 인생을 100세로 설정하고, 이를 4등분하여 사계절로 나눈다고 한다. 25세까지인 삶의 첫 계절 봄은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에게 배우고 사회에서 학습하는 시기, 그리고 50세까지인 여름은 그동안 익힌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는 시기, 75세까지는 인생의 가을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삶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시기, 마지막 계절인 겨울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는 시기이다.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를 품고 대대로 살아온 이들이 생각한 삶의 시간표에 따르면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가장 풍요로운 계절, 가을을 살고 있다. 봄과 여름내 햇살과 바람을 품은 곡식과 열매들이 알알이 영글어가는 계절, 나는 이 가을에 무엇을 거두어들이고 무엇을 비워내고 있는가를 생각한다. 가을에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며, 더 온전한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시기라는 말에 오래 눈길이 멎는다. ‘더 온전한 나’라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화려하거나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가 기준이 될 것이기에. 

 

온전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나를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환갑을 맞이할 즈음, 나는 우울증으로 한동안 힘들어했다. 오랫동안 친구라고 생각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큰 사기를 당한 뒤였다. 애지중지 키웠던 딸아이가 내 반대를 무릅쓰고 국제결혼을 하고 외국으로 떠난 후, 나는 더욱 내 안으로만 침잠해 들어갔다. 남편과 친구들의 진심어린 걱정과 관심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인생의 가을을 유예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뜨거웠던 여름이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그리고 그 여름에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가꾸었던 열매가 알이 실하고 단단하기만을 바랐지만 실은 벌레 먹고 여기저기 흠집 난 것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우울증이라는 캄캄했던 터널을 온 힘으로 빠져나오는 동안, 마침내 나는 깨닫게 되었다. 때론 초라하고, 때론 어리석고, 때론 너덜너덜해진 흔적들이 가득한 내 삶의 부끄러운 민낯을 외면하지 않고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의 인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조차 온전히 내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받아들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용서라는 생각이 든다. 잊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면, 용서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그런 나 스스로를 용서하고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는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말갛게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용서할 수 있어야 비로소 남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은 또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내 안에만 갇혀서 허우적거렸던 내 시간들이 활자들 사이사이에 비친다. 나는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며, 더없이 크고 다사로운 위로 속에서,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 이것은 저자의 말대로, 나를 봐주겠다, 대충 넘어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실수와 어리석음을 반복할지라도 또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뜻이다.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실망스럽더라도 결국 나를 온전히 책임지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우울증을 앓았던 일, 가족과 주변을 힘들게 했던 일을 부끄러워하며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껏 내게 주었던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돌려주고 싶다.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에 제법 가을의 내음이 흠뻑 묻어난다. 봄과 여름만큼 환하고 눈부시지는 않지만, 겨울만큼 평온하고 고요하지는 않지만, 가을은 가을 나름대로의 풍요로운 아름다움을 한껏 담고 있다. 우리의 삶을 이루는 모든 계절이 그렇듯, 내 인생의 가을도 오롯이 지금 이 순간을 채워가고 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빛나는 하루하루를 사랑스럽게 품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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