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8758

길은 끝나지 않았다. - <나는 넘어질 때마다 무언가를 줍는다>를 읽고 - 

 

                                                                                                                                             이효중

 

어머니는 앉아 계셨다. 가을바람에 야윈 해를 조금이라도 느끼시려는 듯, 거실에서 해가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의자를 놓으셨다. 몇 십 년 세월에 다리 한 쪽이 닳아, 앉을 때마다 삐그덕 신음을 토해내는 나무의자였다. 소리가 듣기 거북해 의자 좀 바꿔 보시라고 할 때마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오래 쓰면 탈이 나는 게 자연스러운 법인데 막 바꾸면 쓰냐던 어머니였다. 여자 몸으로 3남매를 키워 낸 어머니이시니, 절약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을 것이다. 그렇게 예순 여 해를 건너오셨는데,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고 오래 지닌 습속을 버릴 수 있을까. 

 

허투루 넘겼던 어머니의 말이 어느 순간 무릎을 치게 할 때가 있다. 그 순간 새기지 못하고 흘린 말들이 시간을 회귀해 내 앞에 덜컥 서 있을 때가. 

 

백병원 응급실이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사람이고 물건이고 오래 쓰면 탈이 난다던 어머니의 말이 인장처럼 가슴 위에 아프게 박혔다. 인생이라는 놈이 이렇게 또 뒤통수를 치는구나 싶었다. 무슨 정신으로 택시를 탔는지 어떻게 병원까지 갔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긴장한 탓에 환자복 단추도 어긋나게 채우고 파르라니 떨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만 눈에 맺혔다. 잘못 채워진 단추를 바로 채워드리는 내 손도 어머니의 몸마냥 떨렸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괜찮을 거라고, 별 일 없을 거라고 주문처럼 읊조렸다. 어머니의 상태를 보러온 젊은 의사에게 가난한 무릎을 내려놓으며 ‘제발, 제발...’ 차마 끝맺을 수 없는 한숨 같은 말만 토해냈다. 

 

나이가 들수록 심각한 것은 되도록 멀리 하려 했었다. 일이건 책이건, 뭔가 조금이라도 복잡해 보이면 지레 손을 놓게 되었다. 일상도 피곤한데 굳이 그런 것에까지 감정소모를 하고 싶지 않다는, 어찌 보면 조금 이기적인 자기 방어였던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일을 겪은 후, 가슴이 막히고 앞이 보이지 않으면 자연스레 책을 들게 되었다. 내 답답한 속을 털어놓을 곳이 책뿐이었다. 박인선 작가의 책도 그렇게 만났다. 어머니가 치료를 받으시는 동안 나는 몸보다 마음이 늙었고 그런 내 마음을 걸러줄 정신적 휴식이 필요했다. 작가는 넘어졌을 때마다 무언가를 주웠다고, 그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어머니가 치료를 받으시는 동안 이기적인 아들이었을지 모를 내 자신을 되돌아보았고, 내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두 달 간의 치료로 어머니는 다행히 예전의 모습을 찾으셨다. 날이 좋을 때는 가벼운 걸음으로 산에도 가시고, 햇살이 푸진 날에는 거실에 의자를 놓고 앉아 따뜻한 기운을 받기도 하신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조금 더 결속력이 생겼다. 나이가 들고 사회 활동을 시작하고 각자의 일가를 꾸리며 정작 어머니를 돌아보지 못한 시간이 많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계기도 되었다. 어머니를 통해 나는 크게 넘어졌고 넘어져서야 비로소 소중한 것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책은 전반적으로 평이한 문투로 당연한 이야기를 전한다. 어디에서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우화가 제법 있기도 했고, 작가의 첨언은 살아가면서 몇 번쯤 생각하게 되는 그런 말들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힘든 순간 이 책에 큰 위안을 받았다. 책 안에 존재하는 당연함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잘 알고 있는 가치를 등한시한다. 너무 당연하기에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자식의 손을 놓지 않는 내 어머니의 존재를 잠시 잊었던 것처럼...

 

작가는 화살은 뒤로 당겼을 때 앞으로 날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이 어려움으로 잡아끈다고 생각될 때 그건 삶이 나를 더 멋진 곳으로 보내주기 위한 것이라는 글귀를 포스트잇에 메모해 책상 한켠에 붙였다.

 

어머니가 치료를 받으시는 동안 나는 여러 번 무릎이 꺾였고,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노쇠한 몸을 이끌고 좋아지기 위해 노력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손이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더 멋진 내일을 보기 위해 책상에 남겨진 메모를 마음에 새기며 다시 몸을 추슬렀다. 

 

끝이 없는 긴 길이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 위를 내가 걷고 있다. 길 중간에는 맑은 물도 흐르고 쉬어갈 수 있는 나무 그늘도 있지만, 가파른 산도 있고 돌부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끝까지, 오래오래 가 볼 생각이다. 지난 세월동안 내 어머니가 나를 엎고 걸어오셨으니 이젠 내가 어머니를 엎을 차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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