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9794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 <너무 애쓰지 말아요>를 읽고 -

 

                                                                                                                                             배가브리엘

 

너무 애쓰지 말아요. 책의 제목도 독특했지만 사실은 책의 표지가 더 마음에 들었다. 객지 생활을 오래해서인지 집에 책을 비롯한 물건들이 쌓이는 걸 굉장히 싫어해서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책을 잘 사지 않고 주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편인데- 하지만 또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는 잘도 산다- 이 책도 처음엔 고양이가 상자에 들어가려 바둥바둥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친구에게 선물하려 샀다가 그냥 내가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책의 편식도 심한 탓에 평소 소설이나 예술서만 읽어왔는데 이런 심심한 맛의 에세이를 집 책장에 꽂아놓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에세이가 심심하다는 건 내 편견이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그만큼 쉽게 읽히고 또 쉽게 잊혀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를테면 소설이 유명한 레스토랑의 양념 강한 일품요리라면 에세이는 국, 밥, 김치, 된장찌개로 대충 차려낸 집밥 같다. 소설은 어떤 클라이맥스와 안티클라이맥스를 갖고 질주하는 반면, 에세이는 자기 이야기나 주변 이야기를 실타래 풀듯 풀어나가는 듯한 느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있겠지만 나는 어쨌든 예전부터 픽션의 세계가 좋았다. 오감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세계, 현실같지 않은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가 나오는 걸 좋아했다. 읽은 소설에 비례해 "영화에 미쳤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영화를 많이 봤는지도 모르겠다. 한 스마트폰 어플 덕분에 여태껏 적어도 1500편이 넘는 영화를 봤다는 걸 알게 됐고(정작 그런 숫자가 나오자 스스로 약간 놀랐다), 그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책을 읽는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분야가 심하게 편중되어 있다면 역시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을 테다. 부끄러웠다. 예컨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수필집이나 영화감독 박찬욱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대신 한 이름모를 작가의 추리소설이나 B급 코미디영화를 보는 걸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이 강한 자극으로 도망쳐 왔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일상을 잊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가상의 세계로 도망갔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오는 것이다.

 

왜 도망칠까. 왜 하루에 한 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 일주일에 세 권 이상의 책을 읽으면서ㅡ 무척 문화적인 듯 들리지만 사실은 껍질밖에 없는 가상의 세계에서 머리만 팽팽 굴리고 있는 걸까. "넌 너무 영악해", "넌 너무 까칠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고 아직도 그런 소리를 듣고 있는 내 자신을, 이 심심한 듯 삼삼한 에세이를 읽으며 되짚어봤다. 너무 애쓰지 말라니, 무엇을? 내가 지금 애쓰고 있는 것, 노력하고 있는 것은 뭘까? 역시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무리 돌이켜봐도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한 기억이 몇 개 떠오르지 않는다. 공부도 설렁설렁, 다른 것도 설렁설렁, 삼천 피스 퍼즐도 설렁설렁 - 몰두한 건 책과 영화뿐이었다. 아, 나는 별로 노력한 게 없는데, 다들 자기계발서를 읽느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둥 "뭔가에 미쳐라"는 둥 "흔들리고 아파야 청춘'이라는 둥 아등바등 고생하며 제 갈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나는 뭘 하고 있는걸까, 하는 자괴감이 드는 나에게 이 책은 말했다. 너무, 애쓰지, 말아요, 도망치려고. 대체 어디까지 도망치려고.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단어들의 나열이다. 과거를 흘려보내라는 둥,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둥, 지금 당신도 충분히 멋지고 그러니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라는 둥, 하지만 그런 말들이 피아노 음계처럼 이어지는 걸 따라가다 보면 왜 이리 쉬운 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로, 간단한 단어와 단어의 연결로 글을 엮었는지 조금씩 알게 된다. 그토록 쉬운 말을 정작 실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이고, 그래서 단순하고 쉬워 보여도 꾸준한 다독임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렵다. 정말 어렵다.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듯이 안 좋은 일만 연달아 일어나는 날도 있다. 비 오는 날 보도블럭에 운동화가 미끌려 넘어지고, 다 젖은 신발로 집에 돌아와 의자에 앉았더니 아랫나사가 풀려버린 탓에 책장에 뒤통수를 부닥치고, 어질어질한 머리 때문에 일이 밀려 스트레스가 쌓여서 또 주전부리를 주워먹었더니 속이 느글거리고- 불과 그저께 나한테 벌어진 일이다. 옆구리와 뒤통수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좀만 아프고 나면 이 멍이 노란색으로, 보라색으로, 이윽고 짙은 갈색으로 변한 후 서서히 옅어지면서 없어질 때쯤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일이지만, 비할 수 없이 더 나쁜 일, 힘든 일, 괴로운 일도 일어난다. 누구에게나 다 힘든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꼭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들 같다. 내가 잘못해서 시험에 떨어진 것 같고, 좋아하던 친구와 연락이 끊긴 것 같고, 엄마나 아빠와 다툰 것 같고, 몸이 아픈 것 같고, 그런 수많은 자책으로 몸이 움츠러들 때가 많다. 올해는 더 나을 줄 알았는데 별로 나아진 게 없다는 걸 여름이 지나고 깨달으면서 요새 머리가 온통 뒤엉킨 기분이었다. 가을이 되면 우울해지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까- 자신의 잘못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닥쳐오는 듯 한 압박감 때문일까. 나는 그런 복잡하고 우울한 기분을 잊어버리려고 그토록 영화를 많이 보고 소설을 읽어댔던 것도 같다. 분명 영화를 보면 잊을 수 있다. 하지만 보고 나면 어딘가 허무해졌던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이 아니라 그런 도피처가 되었던 까닭이었을까. 단순하고 간단한 문장과 그림으로 이어지는 책을 읽으며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내가 내렸던 잘못된 선택들이 분명 있었다. 성격이 그리 사분사분하고 다정한 편이 아닌 탓에 오해 아닌 오해도 많이 샀고 넓은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저자가 책을 통해 내려주는 '처방', 위로, 말 한 마디를 들으며 심심한 집밥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듯 책 안으로 젖어들었던 시간 동안 그 많은 처방전을 모두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적어도 세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새삼 깨달았다- 잘못된 선택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마음이 비명을 지르게 하는' 자책은 무의미하다는 것,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해도 괜찮다는 것. 

 

돌이켜보면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그때 그 순간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고, 그게 나쁜 결과를 불러왔을 수도 있다. 저자의 말대로 사람은 전부 다르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내게는 좋았던 것이상대에겐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나로써 어떻게든 내릴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다면, 이미 흘러간 시간 속에 묻어두는 게 현명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냥 지금 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으리라. 혼자서 너무 애쓰고 안달복달하기보다는 그냥 편안히 자기 자신을 내버려둘 줄 아는 게 앞으로도 또다른 최선의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이 좋았다고 스스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리라.

 

짧고 단순한 책. 롤러코스터처럼 사람을 미지의 시공으로 데려가기보다는, 완만한 미끄럼틀처럼 사람을 일상으로 데려다주는 책이었다. 책을 덮으면 표지 속 고양이는 계속 뭔가를 끄집어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고 - 끝없이 어디로 가버리려 하는 나처럼! - 한번에 이 조언을 다 실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빤하게 알고 있고, 이 조언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만 읽기에는 아까운 책이라는 것, 한 번만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냥 목마를 때 물병의 물을 조금씩 마시듯, 입안이 씁쓸할 때 사탕을 하나 꺼내 빨아먹듯 그렇게 늘 가까이 두고 보면 되는 책, 들으면 되는 이야기들이다. 밍숭맹숭한 맛이지만 역시 꼭꼭 씹어 먹으면 피가 되고 뼈가 되는 집밥처럼 말이다. 아마 냄비 받침으로 이 책을 쓴다 해도 저자는 화내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늘 가까이에,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펼쳐볼 수 있는 책을 한 권 얻었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몇 안 되는 책 중에서도 정말정말 몇 안 되는, 지금에서 도망치는 책이 아닌 지금으로 돌아오는 책이다. 왜냐면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으니까,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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