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9779

​특별한 케이크를 만드는 삶의 레시피  

- <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한>을 읽고 -

 

                                                                                                                                             김미양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나는 제주에서 막 이륙한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가족 품을 떠나 홀로 출발하는 길이었다. 작은 섬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열아홉 살 소녀의 첫 도약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바다 건너 대전에 있는 사립대에 입학한 나를 두고 친척들은 육지대학 간 ‘해외 유학생’이라 불렀다.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열아홉, 나에겐 날개가 있었으니까. 그 후로 십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어딘지 모르는 허공을 헤매고 있다. 이십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날개가 꺾이기 시작했고, 추락과 재도약을 반복했다. 열아홉의 내가 상상했던, 내가 간절히 닿고 싶은 ‘그 곳’은 생각보다 너무 멀었다. 나는 지쳐갔다. 전력을 다해 날개를 퍼덕여 봐도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랑 똑같다는 말, 스물 넷,다섯까지가 ‘절정’이고 그 이후로는 폐기처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쉽게 흘려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날지 못하는 스물아홉, 나 이제 폐기처분 되는 걸까.

 

그러던 차에 [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한]이라는 책을 만났다. 처음 제목을 읽었을 땐, 그냥 뻔한 훈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잖니, 스물아홉에 시작해서 이렇게 멋지게 성공한 사람들도 있어, 너도 힘내.” 그렇게 나를 어르고 달래는 말들. 그런데 책장을 하나 둘 씩 넘기면서 나는 생각지도 못한 특별한 위로를 받았다. 스물아홉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나에게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해주지 못한 ‘특별’한 위로를 건넨 주인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특별’하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정인, 수정, 민재, 효선은 딱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작가가 우리 집에 감시카메라를 달았나’ 싶을 정도로 격한 공감을 이끌어내지만 단순히 나의 일상을 옮겨 적은 일기장과는 전혀 다른, 강한 감동과 위로의 비결은 바로 작가의 노력에 있었다. 작가는 서른아홉 살의 여성 서른한 명에게서 그들이 지닌 스물아홉 살 무렵의 기억들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기억들을 잘게 썰어서 양념을 더해 버무리고 진하게 농축시킨 끝에 비로소 책 한 권이 완성된 것이다. 스물아홉 무렵엔 누구나 불안하다고, 그 고개 너머에는 또 새로운 경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장통을 먼저 겪어 본 인생 선배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페이지 구석구석에 따뜻하게 녹아있다. 

 

누가 감히 인생을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하는가. [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한]을 통해 나는 세상에 없던 나만의 케이크를 만드는 ‘삶의 레시피’를 얻었다. 

 

첫째, 내 도구가 초라해 보인다고 해서 기죽지 말 것. 내 친구가 갖고 있는 비싼 도구에 눈이 돌아가는가? 때론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누구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척척 절로 완성되는 최신식 도구를 갖췄으니까. 내 주변에도 부자 부모님 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별다른 노력 없이도 편안히 살아가는 ‘민재’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들도 나름의 상처와 고민이 있었음을, 민재를 보면서 겨우 깨달았다. 서로의 도구를 비교하면서 자존심을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낡은 도구라 할지라도 내 손에 맞게 부지런히 갈고 닦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경험’이라는 재료를 소중히 여기고 골고루 사용할 것. 달콤했던 경험만 모아 한껏 음미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 하지만 눈물 콧물 쏙 빼놓는 맵고 쓰린 경험도 버리지 말고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수정’의 복잡한 가정사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나 역시 수정과 마찬가지로 가정환경에서 오는 상처가 깊었고, 그 상처를 남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웠다. 하지만 상처를 자주 들여다볼수록 더 빨리 치유가 된단다. 지금의 아픔, 시련, 실패의 경험들도 언젠가는 훌륭한 재료로 쓰일 수 있다. 오히려, 그런 재료들을 ‘숨김 맛’으로 사용할 때 나의 케이크는 더 매력적으로 변할 것이다. 

 

셋째, 한번에 뚝딱, 성공하려 하지 말 것. 작은 케이크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재료 하나하나를 계량하고 가루를 꼼꼼이 체치고 팔이 빠지도록 달걀을 휘저어 거품을 올리고, 반죽을 고루 섞어서 오랜 시간 오븐에 구워내는 일련의 과정들이 필요하다. 꿈이란 건 ‘띡’ 하고 누르면 ‘딱’ 하고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다. 생각만큼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전전긍긍하는 ‘정인’의 모습에서 나는 요즘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너무 조급하다보니 오히려 노력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과정 하나하나를 즐기면서 천천히 나아갈 필요가 있다. 

 

넷째,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단하나 뿐임을 기억할 것. 틀에 찍어낸 듯 똑같은 모습의 ‘붕어빵’ 케이크를 원한다면, 정형화 된 레시피만 따르면 된다. 작가는 왜 굳이 서른한 명이나 되는 여성들을 인터뷰해야 했을까. 각양각색, 개개인의 지닌 개성을 세밀하게 포착해서 글의 주인공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던 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공장에서 찍어낸 양산형 제품이 아니다. 남이 정해놓은 레시피에 구애받지 말고 나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내야한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그토록 염원하는 나만의 특별한 케이크는 사실 평생 완성되지 않는다. 끝없이 변화하고 변화하는 현재 진행형으로 ‘세상’이라는 쇼케이스 안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자. 

 

이 모든 삶의 레시피들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엎지르고 태우고 망칠까봐 겁내지 말고 시행착오를 반복해라.’로 압축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제품들이 널리 사랑받는 경우가 많다. 케이크 틀이 없어서 조개껍질에 구워 낸 조개모양의 마들렌, 요리책을 무시하고 모든 재료들을 다 1파운드씩 넣어 만든 파운드케이크가 그렇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초콜렛 가나슈’도 어느 초보 제과사가 실수로 생크림을 쏟는 바람에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나는 왜 고작 크리스마스에만 팔리는 ‘시즌’상품에 견주어 내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재단하려 했을까. 스물아홉, 내 날개가 꺾였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이제야 비로소 ‘현실’이라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가려고 했던 미지의 ‘그 곳’은 훨훨 날아서 가는 곳이 아니라, 한 발 한 발 묵묵히 걸으며 가야 하는 곳이었다. 계단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새롭게 개척해서 나아가야 하는 가시덤불 밭이다. ‘삶의 레시피’를 손에 쥐고, 과감히 한 발짝을 옮겨본다. 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한 스물아홉. 스물아홉이라 고맙다. 미래를 알 수 없어 한없이 불안하고,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아쉬워 몸서리치는 스물아홉이라 고맙다. 지금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내 인생 다시 오지 않을 아름다운 시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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