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9814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여행하는 인간’을 읽고

조영남


 얼마 전, 딸은 직장을 그만두고 호주로 가겠다고 했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다른 나라에 대한 동경이 그 이유였다. 호주에서 일하면서 여러 나라를 여행할 거라며 계획을 잔뜩 늘어놨다. 그냥 자신의 꿈을 말한 거겠지 싶어 나는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워킹 홀리데이 비자 신청과 신체검사 등의 절차를 밟는 것을 보고 걱정과 염려는 현실이 되어갔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횡포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테러 등의 일들에 걱정이 앞섰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여행을 하겠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딸을 설득했다. 하지만 못 가게 할 만큼 이유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느끼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과 여행에 대해 이해가 필요했다
  『여행하는 인간』을 찾아 들었다. 자연스레 이끌린 것은 ‘원북원부산운동’ 선정 도서이기도 했고, 여행의 심리학이라는 부제 때문이었다.
 책을 펼치자 ‘그때 길을 떠났다.’ 라는 글귀에 먼저 눈길이 갔다. 딸이 진짜 떠나고 싶은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일에 지치고 다른 곳을 동경한다고 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삶에 지쳐 휴식이 필요할 때, 매너리즘에 빠져 있을 때 여행은 좋은 처방이 되어준다고 하였다. 솔직히 너무 빤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열두 가지 주제로 풀어낸 여행의 내면과, 이 시대에 여행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읽으면서 수긍하기 시작했다. 여행은 훌륭한 수업들로 이루어진 이동식 학교이자, 삶의 지혜와 치유의 힘을 지닌 본능이자, 삶이 곧 여행이라고 하였다. 인류사는 이동의 역사였고 일상 자체가 모험의 연속이었던 만큼 여행은 삶이고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여행에 관한 다양한 사례와 여러 책의 인용 글들은 책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해줬다. 특히 네루다의 시의 구절을 인용한 3장은 필사를 해둘 만큼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이스터 섬에서 무엇에 이끌리듯 통가리끼 해변의 일출을 보기위해 필사적으로 가는 장면에서 나 또한 가슴이 뛰었다.
 심장이 바람에 풀리는 체험은 결코 앉아서는 알 수 없음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2년 전, 캄보디아로 여행을 갔을 때이다. 수천 년의 누적된 시간 위로 서서히 앙코르와트를 붉게 물들이던 일출을 잠 때문에 놓쳐버렸다. 그때 일출을 보고 온 사람들이 황홀경을 경험했다며 내내 들떠 있었다. 나는 일출 사진을 보며 바보 같은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두려움이 없는 게 용기가 아니라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용기다.”

 두려움에 관한 이 빛나는 문장을 만났을 때는 그 빛으로 새로운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 비로소 나는 딸이 여행을 하는 동안 열두 가지 여행의 내면을 다 경험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움에 눈뜨고, 그동안 힘들었던 심신을 휴식으로 재충전하고, 울긋불긋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딸이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 스카이다이빙이라고 했을 때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무모한 일에 나서지 말라고 말하긴 했지만, 자신이 해보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모험을 하는 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생각의 차이, 관점의 차이가 얼마나 큰 깨달음을 주는지 나 자신도 놀라웠다.  
 그동안 딸은 혼자서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두려워하면서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기꺼이 두려움을 감수하곤 했다. 그와 달리 나는 여행에 대한 니체의 분류에서 보면 둘러보는 여행 1단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패키지로 여럿이서 함께 떠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고 소비자로서의 여행이 전부였다.
 한계를 넘어서는 한계 바깥으로의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발이 아프도록 걸어보지도 못했고, 낯선 존재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여행을 통해 삶의 절정인 몰입을 경험하지도 못했다. 여행은 내게 있어 수박 겉핥기식의 맛보기 같은 거였다. 내가 살아있음의 절정을 나는 매번 놓쳐버렸다. 이건 분명 여행에 관한 태도와 마음의 문제일 거라고 생각한다. 해외여행에 대해 부정적인 때도 있었다. 자주 떠나는 사람을 두고 사치와 허영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서 여행중독에 걸린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여행에 대한 갈망의 원인이 참으로 다양함을 알게 되었다.
 시간과 관계가 만나 삶을 이룬다고 하였다. 여행에 시간을 투자했지만 진정으로 무엇과의 관계는 이루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 무엇이 사물이든 사람이든 스쳐 지나가기 바빴던 것은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 언제나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 몇 장과 기념품과 에피소드뿐이었다.
저자는 묻는다.
 “당신에게 생의 아름다운 시간은 언제입니까?”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충만했던 순간이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자의식과 시간 감각이 사라진 경험은 어릴 적 놀이에 빠져 본 것이 고작이었다. 나를 위로하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회복과 치유의 공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스 샤모니까지 걸어가다가 마기오르 호수와 마주한 시인 워즈워스는 평생 하나의 기억으로 행복하리라고 말했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런 적이 있었던가…….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현대인에게 있어 여행은 삶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삶을 덜 표출 할수록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기 쉽다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출하기 위해서는 여행을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좋은 여행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행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 이후의 일상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좋은 여행은 여행자 정신을 유지하고 일상을 보다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주지만, 좋지 않은 여행은 여행 후의 일상이 더 초라하게 느껴지거나 고달프거나 빈곤해져가는 것이라 하였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여행자의 숙소라고 했다. 여행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준 대목이었다. 그만큼 일상도 여행자의 시간처럼 살아내야 하는 것이리라.
 딸은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해 두었고, 자신이 있을 집도 알아둔 상태다.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자처하고 새로운 도전과 마주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무엇보다 건강과 안전이다 그리고 여행이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자신의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주었으면 한다. 세계 각국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닌 자기 길을 찾아 길 위에 서 있는 진정한 여행자가 되었으면 한다.
 ‘좋은 여행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 풍경을 바꿔놓는 것은 물론 때로는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였다.
 떠나기 전에 이 문장을 딸에게 주고 싶다. 나 또한 가슴에 새겨 여행하는 태도와 마음속 풍경이 달라짐을 경험하고 싶다. 일상의 무료함이나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 깊이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여행을 꿈꾸면서 말이다.
 여행하는 인간의 어원이 ‘그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듯이 이제 나도 새로운 길 위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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