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감미로운 은빛 감성 에쿠니 가오리 × 소녀 감성 일러스트레이터 김옥
『홀리 가든』 한국 출간 10주년 기념 리커버 개정판
정말 멀리까지 왔다고 생각하고, 정말 외톨이라 생각하고, 그래도 세수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가호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세수는 해야 하고, 아무리 그래도 이는 닦아야 하고, 아무리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 한다.
5년 전에 끝난 사랑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호는 이사를 할 때마다 비스킷 깡통과 머스캣 상자를 가지고 다닌다. 한쪽에는 자신의 웃는 얼굴이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이 잔뜩, 다른 한쪽에는 차마 깨뜨리지 못한 파란 장미 무늬 홍차 잔이 들어 있다. 모두 틈만 나면 가호를 괴롭히는 과거의 파편들이다. 아내와 19살짜리 딸이 있는 남자와 원거리 연애를 하는 시즈에는 그의 충고에 따라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아침을 꼭 챙겨 먹고, 학교를 쉬는 날에도 수영은 꼭 간다. 그 사람과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하지만,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고 나면, 혹은 자신이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고 나면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오랜 시간 서로의 과거를 지켜봤고, 현재를 보고 있는 가호와 시즈에는, 때로는 서로의 변화에, 때로는 변하지 않음에 놀라기도 하고 지긋지긋해하기도 한다. 잘 알기 때문에 물을 수 없는 것들로 고민하고, 잘 알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말들로 괴로워하면서, 둘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독자들은, 누군가의 앞에서는 태연한 얼굴을 하지만, 혼자가 되고 나면 온몸으로 슬퍼하고, 절망하고, 또 이겨내는 가호와 시즈에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하루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자신이 현재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환상이야.”
언젠가, 너무도 괴로워 그렇게 말했다. 절반은 진심이었다.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즈에는 잠시 침묵하고서 매정하게 이렇게 말했다.
“괜한 억지 부리지 마.”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국내 일본 문학 열풍을 주도해온 에쿠니 가오리는 단아하고 청아한 문체와 절제된 화법으로 그녀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 많은 독자를 확보해왔다. 특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하다’고 여겨질 만한 사람들을 색다른 삶의 한 형태로 자연스럽게 그리면서 그 속에 우리들이 무심히 지나칠 만한 일상의 풍경들을 담아내는 점이 돋보인다. 이런 작법은, 전체 줄거리가 아닌 문장 곳곳에 리얼리티가 담겨 있기 때문에 독자 개개인의 경험과 공명한다. 즉, 5년 전의 사랑에 집착하는 가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형태는 다를지라도 가호의 ‘비스킷 깡통’ 같은 과거와의 연결 고리를 갖고 있을 것이고, 유부남과 연애하는 시즈에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단순히 사랑하기 때문에 시즈에가 억지로 아침을 먹는 것 같은 일들을 해봤을 것이란 점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또한 에쿠니 가오리는 큰 사건이나 클라이맥스 없이 캐릭터나 주변 묘사만으로 짜임새 있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데, 『홀리 가든』 역시 가호와 시즈에를 비롯해 ‘나카노’, ‘코끼리 다리’, ‘교코’ 등,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여러 에피소드들 속에 잘 나타나 있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누구에게, 어떤 에피소드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읽게 된다는 것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지닌 매력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18년 전에 이 모자이크를 만들었던 나와 지금의 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가호는 묘한 안도감이 가슴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시즈에나 나카노나, 그리고 쓰쿠이마저 그런 가호에게서 고루 먼 위치에 있다. 고루 멀고, 그러나 너무 멀지 않은 위치.
떠나려는 나카노를 붙잡고 만 가호는 초등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고 18년 전 졸업 작품으로 자신이 만든 모자이크를 보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채로 시간의 흐름과 하루를 파고드는 사랑이란 감정에 휩쓸리던 가호는, 새로운 것에 대한 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렇게 해소한다. 모든 것이 변해도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혹은 그들)와 나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리고 가호는 차마 깨뜨리지 못하고 상자 속에 담아두었던 파란 장미 무늬 홍차 잔을 새로운 사람, 나카노에게 내민다. 어떤 옷을 입고 있든 그 옷을 벗고 나면 남는 것은 그저 몸일 뿐인 것처럼, 추억이라는 이름을 벗고 나면 남는 것은 흔하고 평범한 보통 물건뿐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홍차 잔을 깨뜨리거나 계속 봉인해두지 않는 가호의 모습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감정으로 그려낸다. ‘과거’를 없던 일로 하거나, 잊어버리려 애쓰지 않고 그저 그대로 시간을 지나와 현재를 맞는 가호를 보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도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잊지 않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작가 소개
저자 : 에쿠니 가오리
1964년 도쿄에서 태어난 에쿠니 가오리는 청아한 문체와 세련된 감성 화법으로 사랑받는 작가이다. 1989년 『409 래드클리프』로 페미나상을 수상했고, 동화부터 소설, 에세이까지 폭넓은 집필 활동을 해나가면서 참신한 감각과 세련미를 겸비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으로 무라사키 시키부 문학상(1992), 『나의 작은 새』로 로보노이시 문학상(1999), 『울 준비는 되어 있다』로 나오키상(2004), 『잡동사니』로 시마세 연애문학상(2007), 『한낮인데 어두운 방』으로 중앙공론 문예상(2010), 『개와 하모니카』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2012)을 받았다. 일본 문학 최고의 감성 작가로서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 작가로 불리는 그녀는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도쿄 타워』,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호텔 선인장』, 『낙하하는 저녁』, 『좌안 1, 2』, 『달콤한 작은 거짓말』, 『소란한 보통날』, 『하느님의 보트』, 『우는 어른』, 『울지 않는 아이』,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벌거숭이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저물 듯 저물지 않는』 등으로 한국의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역자 : 김난주
일본 문학 전문번역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히가시노 게이고의 『성녀의 구제』 등 일본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를 번역한 우리나라의 대표 번역가다.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한 후, 1987년 쇼와 여자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오오츠마 여자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했다. 그 밖의 옮긴 책으로 『겐지 이야기』,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가면 산장 살인 사건』, 『시간이 스며드는 아침』, 『100만 번 산 고양이』, 『우리 누나』 등이 있다.
목 차
1 홍차 잔
2 한낮의 전철
3 피크닉
4 돌부리
5 탬버린
6 생각하지 않는 연습
7 기억
8 완두콩밥
9 천사
10 전원
11 사랑의 복숭아
12 밤의 전철
13 카스텔라의 밤
14 공주님 놀이
15 금기
16 양호실
17 포르노보다 위험한 것
18 하루란 무엇인가
19 싸움
20 초겨울의 드라이브
21 생각하는 연습
22 거스러미
23 밤길
24 다시, 홍차 잔
작가 후기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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