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그 아이들은 이미 세상 모든 것의 이름을 하나하나 바꾸고 있었다"
밀림의 도시에 출현한 정체불명의 아이들을 둘러싼 도덕률적 스릴러
이 소설에서 밀림의 도시를 교란하는 32명은 마치 무인도에 고립되는 바람에 질서를 잃으면서 인간의 야만적 본성을 드러내는『파리대왕』 속 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들과 공포에 빠진 도시라는 소재는 고전 호러 영화 〈저주받은 도시〉의 어린 외계 생명체들을,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의 변화가 읽히는 가상의 도시는 『백년의 고독』 속 마콘도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장르를 변주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소설에서 작가는 자신만의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한다.
32명의 아이들은 도시에 물리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까지 점령해가면서 이야기의 불길한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지도자가 없는 그들의 공동체가 규칙에 지배받지 않으며 흡사 즐거운 “놀이”를 하듯이 모든 일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유혹”을 동시에 느끼고, 이로 인해 도시는 기존의 가치관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렇듯 도입부에서 이미 정해진 결말로 나아가기까지 향방을 알 수 없는 전개를 보이는 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 의문을 품게 한다. 불쑥 나타나 도시 질서를 무너뜨리고, 일상생활에 균열을 일으킨 32명의 정체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와 ‘유년의 순수’ 신화에 경종을 울리는 사악한 우화
한편 소설의 화자는 사회복지과 ‘공무원’으로서 거리를 떠도는 32명의 아이들을 담당할 의무를 맡게 된다. 화자가 인용하는 사건 당시의 기사와 시 회의록을 보면, 아이들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언론은 그에게 비난을 쏟아내고, 의원들은 뒤늦게야 고아원 예산을 두 배로 늘리라는 등 실현 불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모든 책임을 ‘나’에게로 돌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택했던 부끄러운 행동들을 돌아보면서, 훗날 ‘나’는 회한 어린 목소리로 넌지시 “기억의 복수”라고 말한다.
필연적으로 32명과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던 ‘나’는 또한 ‘아버지’로서도 그들이 일으킨 변화에 당황하고 분노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대표한다. 소설에서 어른과 아이 두 세계가 충돌하는 모습에 대해 작가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유년기의 낙원을 둘러싸고 우리가 집단적으로 구축한 픽션과 가능한 한 그것을 해체시킬 가능성에 관해 성찰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하다는 믿음은 어른들의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 32명을 통해 유년기의 낙원을 해체하며 성찰하고자 한 바는 곧 기성세대가 일방적으로 대상화한 어린 세대 및 주변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이야기의 표피 아래 다양한 함의를 품고 있는 이 소설은 오랜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여러 내레이터들의 기록을 토대로 회고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우리의 현실이란 삶의 경험이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형성된 관념일 뿐 ‘진실’과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32명의 마지막에서 어느덧 ‘빛의 공화국’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 소설은 또 다른 모습을 띠고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안드레스 바르바 Andr?s Barba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시인, 수필가, 번역가, 사진작가. 1975년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문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스페인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미국 보든 칼리지와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2001년 에랄데상 후보작에 선정된 『카티아의 자매』가 네덜란드에서 영화화되면서 바르바의 이름은 국제 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이제 댄스음악을 연주해주세요』 『테레사 이야기』 『8월, 10월』 『광대와 함께』 『작은 손들』(2017년 《가디언》 올해의 책) 등의 소설과 『어느 말의 죽음』 『올바른 의도』 『비가 그친다』 등의 단편집을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산문집 『거울 세계에서 걷다』 『포르노 의식』(공저)과 시집 『자연의 연대기』, 그리고 화가 파블로 앙굴로와 함께 시와 산문의 경계에 있는 독특한 작품집인 『추락의 책』과 『실종자 명단』을 펴내는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선보였다. 번역가로서는 허먼 멜빌,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 토머스 드퀸시의 영미문학 작품을 스페인어로 옮기기도 했다.
2017년 에랄데상 수상작인 『빛의 공화국』은 밀림의 도시를 교란시키는 32명의 아이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 공무원의 알레고리적 내러티브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선과 악, 문명과 야생의 경계를 넘나들며 유년과 순수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도덕률적 스릴러이다.
2010년 영국 문예지 《그랜타》는 ‘스페인어권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작가 22인’에 바르바를 선정했고, 록펠러 재단, 로마 스페인 아카데미, 뉴욕 공립 도서관 등에서 연구비와 지원금을 수여했다. 현재 그의 작품은 전 세계 22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옮긴이 : 엄지영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과 스페인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라틴아메리카 소설을 전공했다. 옮긴 책으로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비롯해,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영혼의 미로』, 마리오 바르가스요사의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루이스 세풀베다의 『역사의 끝까지』, 돌로레스 레돈도의 『테베의 태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계속되는 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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