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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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조영란
출판사항시인동네, 발행일:2021/07/23
형태사항p.126 A5판:21
매장위치문학부(1층)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8965198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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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흔히 ‘역사철학테제’로 불리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그 미래 속의 매초는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문장을 “매 순간이 메시아가 도래할 수 있는 좁은 통로”라고 옮긴다. 유대인에게 ‘미래’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역사적 진보의 필연적 산물로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당시 좌파 진영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자 벤야민이 ‘시간’과 ‘해방’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시집 해설의 첫머리에서 무거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역사’나 ‘해방’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벤야민은 시간, 즉 매 순간을 ‘메시아’가 도래할 수 있는 해방의 시간으로 이해했는데, 이는 ‘시간’을 과거에서 기원하여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것으로, 또한 각 시간들을 양적으로 균질한 시간으로 간주하는 근대적인 시간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메시아’나 ‘해방’ 같은 단어들을 제외하면, 이러한 시간 인식, 즉 매 순간을 새로운 세계가 개방되는 가능성/잠재성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일상’을 대하는 시인의 그것과 유사하다.


용수철은 제 몸에 날개가 있다고 믿는다

트램펄린 위를 구르던 발들이

멀리 날아가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유는

용수철의 비상을 믿기 때문이다


날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지켜온 평온한 둥지 속에서도

도무지 깃들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

공중을 향한 그리움이 있어

체념의 깊이만큼 높이 튀어 오르는 것


누구의 마음속에나 허공을 타진하는 날개는 있고

내게는 남모르는 깃발 하나 있었기에

자꾸 발목이 접질릴 때마다

그토록 심한 몸살을 앓았던 건지도 모른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아무도 모르게 키워온 깃털들이

비명도 없이 뽑히고 있었다는 것

더 이상 떨어질 일 없어 안심했던 곳이

결국 바닥이었다는 것


이제는 반동에 기대어 내가 나를 쏘아 올릴 시간


발끝에 단단히 힘을 준다

바닥의 기억을 털어내며 일어서는 그림자

까마득한 천공 속으로

요동치며 날아가는 뜨거운 날개들

격렬한 혁명처럼 거짓말처럼

- 「용수철의 힘」 전문


조영란의 시는 ‘일상’의 순간들에서 새로운, 낯선 세계를 끄집어낸다. ‘끄집어낸다’라는 표현은 자칫 어떤 세계가 그 순간 안에 내재하고 있는 듯한, 그리하여 시인이 손을 뻗어 꺼내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의 순간들에서 새로운, 낯선 세계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발견’과 ‘창조’가 혼재된 상태에 가까울 듯하다. 철학자들의 설명처럼 ‘가능성(possibility)’이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현실화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잠재성(potential)’이 현실적인(actual) 존재는 아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차원이 있음을, 그리하여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현실세계가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가리킨다면, 익숙한 ‘일상’의 순간들에서 새로운, 낯선 세계를 끄집어내는 시적 발견은 세계를 ‘잠재성’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사실상 모든 시인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의 순간들, 특히 ‘일상’의 시공간을 새로운, 낯선 세계로 변주하는 방식으로 시를 쓴다. 아니, 그 방식이 바로 예술이고 시이다. 시는 일상에 대한 충실한 기록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익숙한 시공간을 해체하는 것이고, 이 해체?변주를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변주와 그 경험은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사실은 모두에게 다른 방식으로 경험될 뿐만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그리하여 신비감은 물론이고 감각적인 긴장과 자극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는 상황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실상 우리의 지각 경험이 만들어내는 동일성이 허구적인 것임을 폭로한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또는 일상과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다만, 경험과 동떨어진 인식이, 관념과 이성을 통해 실제적 경험이 재구성됨으로써만 그것들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될 따름이다. 조영란의 시가 보여주듯이, 시는 이 동일성을 뒤흔듦으로써 익숙한 세계 안에 익숙하지 않은 세계들이 응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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