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마무리는 분명히 있어, 엄마.”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의 시인 김희준.
한 편의 장시 같은, 한 편의 소설 같은,
그가 이 행성에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유고 산문.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 이하 ‘시집’)의 김희준 시인이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유고 산문을 펴냅니다. 우주 미아가 된 ‘나’가 별의 자리를, 별의 목소리를, 별과 별 사이를 넘나드는 이야기가 꽃처럼 빛처럼 쏟아지는 책. 한 편의 장시 같기도 한 편의 소설 같기도 한 책. 그리하여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지구별 여행기’이기도 할 이 책. 1994년 9월 10일 모성(母星)에 태어나 2020년 7월 24일 별 여행을 떠난 김희준 시인, 그가 남김 없는 사랑으로 남긴 끝없을 이야기가 그의 1주기에 맞추어 항해를 시작합니다.
우주 미아가 될 당신을 위하여,
2019년 4월부터 2020년 3월까지 월간 『시인동네』에 연재했던 「행성표류기」 열두 편에 미발표분 원고 한 편을 더해 책으로 엮었습니다. 시인 스스로 ‘행성표류 환상서사시집’이라 기획한 바 있으나 더러 산문이라 불렀으며, 은하를 배경으로 신화와 동화, 전설과 환상을 넘나드는 소설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문장이 행이고 모든 단락이 연인 것은 꿈조차 시로 꾸었던 젊은 시인의 본령 덕분 아닌가 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물론 언어의 경계와 한계를 허무는 시도’(김명철)는 기어이 형식과 장르를 넘어, 별과 우주의 경계를 넘어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타인의 꿈에서 알을 낳는 오네이로이상제나비, 강아지와 고양이의 말캉한 ‘젤리’가 열리는 발바닥나무, 삼백 개가 넘는 목젖을 가진 구관조 북방검정부리새…… 시인이 여행한 행성들은 빛나는 상상력을 촘촘한 자모로 빚어낸 영험한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언젠가 ‘천계도감’이나 ‘천체식물백과’로 남기고자 기획했던 다채로운 종(種)의 기록들을 이 표류기에서나마 반갑게 만날 수 있습니다. 처음 듣는 외계의 이름들, 그러나 낯섦 대신 그리움으로 발음하게 되는 것은 시인의 이 반려들이 밤하늘 향해 발돋움하되 꿋꿋이 모성에 발 딛어 그려낸 꿈들인 까닭입니다. 동화가 실은 오역임을,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가져야 하는 인어가 아가미를 끔벅거리는 반인반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아버린 시인. 그는 우리에게 ‘진짜 외계’, 시의 눈으로 깨어 있어야 볼 수 있는 꿈의 세계를 선물합니다.
땅에 닿자마자 숨을 갖는 신비로운 언어들
발신자가 만들어내는 추상명사가 자라는 땅
만 스물여섯 여름 시인이 이 별을 떠나고 사십구일 되던 날, 그의 첫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 『행성표류기』에는 시집 곳곳에서 출발한 언어, 시집 밖에서 맞닿는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때때로 스펙트럼 행성에선 그리운 사람을 한평생 쓸 수 있는 이름이 내린다”(「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 시집)와 “스펙트럼 종이가 적당한 빛으로 내린다. (……) 그리하여 당신에게 당도하지 못한 편지가 쏟아지고 있다”(54쪽), 두 문장을 포개어봅니다. 혹은 이런 이미지들. “녹슨 화덕에서 장작을 태웠소 아몬드나무가 저녁과 함께 타오르오 식탁에는 떨어진 열매와 꽃잎이 보이오 냄새를 풍기는 곳마다 거리의 아이들이 창틀에 매달렸소”(「캔자스의 산타」, 시집), 동화 『오즈의 마법사』 속 풍경은 “하루는 길죠. 아몬드나무의 장작을 태우면 모닥불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어요. 당신을 비추는 그림자가 아까워서 음영을 한참 바라봤어요”(50쪽)라는 문장을 타고 그리스신화 속 펠리온산으로 옮겨갑니다. 한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이 꼭 닮은 듯 다른 결로 이어지고 출렁이며 이윽고 이루어내는 쌍성(雙星). 그가 남긴 『행성표류기』는 젊은 시인의 시론이자 시작 메모이자 “생의 곡진함” ‘씀의 곡절함’ 가득한 창작 일기라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늘에서부터 거꾸로 침잠하는 막막한 나를,
나의 어떤 마음이 이끌고 있을까.
머리마다 표류 일자를 숫자로 남긴 꼭지들은 때때로 표류기의 형식이었다가, 편지의 말씨였다가, 일기처럼 내밀하고 시의 운율을 타기도 하며 끊어질 듯 끊이지 않습니다. 무한 기호(∞)를 단 어느 조각들에서는 그의 아름다운 모성, 지구에서의 여행기를 만나게도 됩니다. 생의 기억들을 펼쳐 보여준다는 산문 속 신비한 나비처럼,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의 모성, ‘안데르센의 나라’에 그가 새겨둔 기억들을 엿볼 수도 있겠습니다.
『행성표류기』에서 ‘블랙홀양피지’를 통해 행성에서 행성으로 여행하는 ‘나’는 장마다 하나의 별자리를 경유합니다. 4월부터 시작해 한 달에 한 별자리씩 그 무렵 가장 빛나는 성좌를 택했으니, 열세 행성을 지나는 동안 계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봄 끝에 이르는 셈입니다. 책에서는 목동자리, 궁수자리처럼 황도 12궁이라 불리는 익숙한 별자리뿐 아니라 삼각형자리, 컵자리 같은 생소한 별자리들을 지나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가 기록한 48개 별자리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1930년 국제천문연맹이 정한 88개 별자리를 따랐을 수도 있겠으나, 시인은 별을 두고 쏟아지는 이야기이자 핏줄의 운명이라 하였으니, 별의 자리 또한 어디선가 끝없이 무수히 빛날 것입니다.
「시작하는 말」의 4월, 목동자리의 봄, 뱀주인자리의 여름을 지나 다시 까마귀자리의 늦봄까지. 시인이 사랑했던 벚꽃과 유채꽃의 계절에 출발한 이야기는 수많은 식물과 신화와 반려와 환상의 별들, 무수한 꽃의 자리를 지나 다시 여름 초입에 이릅니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태양계 행성의 움직임이 지구를 중심으로 한 궤도에 맞지 않자 복잡한 계산을 통해 기하학적인 궤도를 만들어냅니다. 이 책의 표지에 쓰인 꽃문양이 그 궤도의 일부를 본뜬 것이기도 하지요. 지구라는 모성, 이 땅에 발을 딛고서 넓고 무한한 우주를 품에 안으려 하는 시인의 꿈이 영영 시들지 않을 꽃을 피웁니다.
영혼이 순환하는 쉼터에서
오래지 않아 만나게 될 나의 반려, 안녕.
“여긴 여름이야, 거긴 어때?” 시인의 시비에 그의 시를 빌려 새긴 인사말입니다. 벚꽃의 분홍, 유채의 노랑, 산하엽의 하얀 투명함 두루 지나,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사라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쉼표의 올리브 동산 지나, 시인은 『행성표류기』의 끝에 맺음의 마침표를 둡니다. 생전 시인의 목소리를 옮겨와 「끝나지 않은 말」로 담았습니다. 하나의 별, 하나의 세계를 담은 맺음이자 그래서 닫히지 않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여기에서 출발해 거기에서 끝나지 않을 이야기.
마무리는 분명히 있어, 엄마.
─ 「끝나지 않은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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