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시인은 일상 안에서 일상을 격리한다. 하지만 일상과의 단절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비극적 감성을 저어한다. 그만큼 구체적 삶을 희생하면서 획득하는 시적 성취를 바라고 있지 않다. 이는 삶을 직면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고 사물과 세계를 사랑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가령 「미명의 시간에」는 잠 속으로 틈입하는 일상의 무게를 읽게 한다. 밤과 여명의 경계에서 전정한 자아를 찾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어둠이 이슥한데 창문을 열었다/잠시 선잠 같은 꿈속에서/그녀와 멀쩡하게 같이 있는 것에 놀라/화들짝 깊은 밤을 깨웠다/관계가 회복되려는 탄성이면/외면해야 했는데……//불을 켰다//의미는 무의미하게 지워졌으나/그래도 혹시 남았을 잔영을 툭툭 털었다/여명은 공상空相에 머뭇거리고/새벽을 기다리는/확장된 동공을 눈꺼풀로 덮어/만나고 싶지 않은 꿈의 환란을 지웠다//자기증언이나 다름없는 고흐의 자화상을 폈다//나의 증언이 있는 자화상은 어떤 것일까//은밀하게 그려둔 진실의 윤곽/명암의 붓질로/흔들리지 않는 나의 고백을 대신하며/미명의 시간에 밝힐 것이다 (「미명의 시간에」 전문)
좋지 못한 관계나 결별한 사이도 1연의 ‘그녀’와 같이 무의식에 잔영으로 남아서 꿈속에 등장한다. 의식과 무의식, 기억과 망각, 사회적 자아(me)와 바람직한 자아(I)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몸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진정성을 찾으려는 시인의 의지는 ‘불을’ 켜고 어둠을 물리면서 꿈의 ‘잔영’을 털고 자기 인식으로 나아간다. ‘자기 증언이나 다름없는 고흐의 자화상’을 소환하여 어지러운 ‘공상’과 맞세우면서 ‘은밀하게 그려둔 진실의 윤곽’에 다가간다. ‘흔들리지 않는 고백’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적 주체의 진술이다. 미명을 밝히는 내면의 등불이 시를 생성한다. 적어도 시인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홀로 빛을 발하는 존재이다. 이로부터 타자와 사물의 만남이 열린다. 자아의 연단이 없는 투사, 동화, 감응은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박미정 시인은 반성적 주체의 전제에서 외부를 향하는 의식의 지향을 보인다.
- 구모룡(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교수)
작가 소개
박미정
경남 통영 출생으로 신라대에서 한국어문학 문학박사를 취득하였으며 인제대, 가야대, 신라대 외래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1996년 《한맥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이자 수필가,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현대문학작가연대와 부산시인협회 부이사장, 부산문인협회, 한국창작가곡협회, 한국바다문학회, 사상문화예술인협회 부회장, 부산영호남문인협회 상임고문 및 주간, ‘박문하 문학상’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문학대상, 한국해양문학공모전 최우수상, 영호남문학상 대상, 부산여성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맥놀이』, 『제라늄의 분홍미소』, 『수미산 밖에서』 등 8권과 수필집 『해무를 벗기다』, 학술저서 『한국 현대 해양시 연구』가 있다.
목 차
시인의 말
차례
제1부
이런 날
백일홍 나무
행복한 동거
희망
새 떼 속에 아침이 있다
사랑초
생각 하나
봄날
호젓이
동백꽃
피아노
천사
봄비야
입추
차茶
제2부
능소화
비 개인 오후에 만나는 시
소년의 휘파람
미명의 시간에
처음 가을
입추 탐색
시의 딸꾹질
맥놀이 7
맥놀이 8
맥놀이 9
종소리
제라늄처럼
제라늄의 벽
제라늄의 분홍비소2
제라늄의 분홍미소3
제라늄의 분홍미소4
제3부
빈집, 어장 막
영도의 길, 산복도로
연화도
저만치 꽃지섬
하롱베이
멋쩍은 여행
그날, 완도는
길 위에 완도
길 너머 간월도
약속
아침 바다
태풍
서녘 바다
식탁 모양새
백암산에서
제4부
강가에 선 그대에게
내 안의 여자
아날로그를 달래다
그럴 때, 자갈치에 가다
자매
걷기
은그릇 닦기
딸기
어장집
지리산에서
무심코
해운대 북극곰 축제
소한小寒 한마디
고백
제5부
봄이 오면
부산 동구에서 만나는 고향
황령산에서, 부산
삼원색 종이배
연놀이
부산 항구의 밤
상사화, 그대
망부석
아, 대구大邱구나
함께 가자
함께 가자
을숙도의 계절
아침 바다
돌아온 생명
생꿀
폭염을 향한 비난
고백
시집해설/ 구모룡(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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