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세상을 온통 시(詩)로 바꾸는 새콤한 언어
익숙한 풍경에서 길어 올린 발칙한 감각
2020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 2022년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독창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온 박정완 시인이 신작 동시집 『레몬은 시다』를 펴냈다. 한 존재를 여러 겹으로 들여다보는 시인의 시선과 통찰은 레몬을 신맛 나는 과일이자 한 편의 시(詩)로, 지네를 벌레이자 화물차로 보게 하며 익숙한 일상을 낯설고 풍요로운 놀이판으로 바꾸어 놓는다. 현실과 우주를 자유로이 오가는 독자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동시 50편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자신의 내면과 주변 풍경을 새롭게 마주하는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신 레몬으로 무얼 할까? 신 레몬이 시가 될까?”
익숙한 존재에게 새 이름을 붙여
세상을 다시 빚는 동시
2011년 그림책을 펴내며 데뷔한 박정완 작가는 2020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에 당선되며 시인으로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박정완 시인은 첫 동시집 『고양이 약제사』(문학동네 2023)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고유한 감각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그림책, 동화, 동시 분야에서 두루 개성 있는 작품을 발표해 온 시인이 두 번째 동시집 『레몬은 시다』를 선보인다. 박정완 동시의 특장인 ‘새로운 명명(命名)’은 이번 동시집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익숙한 대상에 시인이 낯선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그 대상은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작품집 제목과 맞닿은 시편 「레몬과 할머니」에서 레몬은 자신을 한낱 식재료의 자리에 가두려는 시선에 “그래도 난 시다”라며 거듭 맞서고, 레몬을 먹을 궁리만 하던 할머니는 마침내 결심한 듯 연필을 꺼내 든다. ‘시다’라는 형용사가 ‘시(詩)다’라는 선언으로 다가오며 비로소 레몬은 소비되는 먹을거리에서 무한한 상상의 대상이자 하나의 세계로 다시 태어난다.
할머니가 말했다/“신 레몬으로 무얼 할까?”//날렵하게 썰어 비릿한 숭어구이에 올릴까?/힘껏 짜서 달콤한 꿀과 함께 차를 만들까?//레몬이 말했다/“그래도 난 시다.”//할머니는 연필을 꺼냈다/“신 레몬이 시가 될까?”_「레몬과 할머니」 부분
이러한 전환은 책 곳곳에서 되풀이된다. 도로를 기어가던 지네는 스스로를 ‘화물차’라고 부르며 등에 푸른 하늘을 실은 듯 굴고(「지네 화물차」), ‘소’와 ‘나귀’가 만나면 먹구름이 몰려오고 ‘소나기’가 쏟아진다(「소 나귀가 온다」). 까맣게 탄 고구마 껍질을 떼어 내자 ‘고구마 굽다’라는 문장에서 ‘고 마 ㅂ다’, 곧 ‘고맙다’라는 따뜻한 말이 남고(「고구마 굽다」), ‘까마귀’에서 ‘까’를 떼면 ‘마귀’가 되었다가 다시 꿰매어지기도 한다(「까마귀를 조심해」). “대상을 다각도로 투사하는 겹눈의 감각”으로 “사물의 표면 아래 잠든 이야기”(김제곤 해설 「언어의 틈새에서 발견하는 온기」)를 깨우는 시인의 창조력은 세계를 다르게 읽어 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의 말놀이는 단순한 유희를 넘어 사물의 의미를 풀어놓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동력이 된다.
세슘의 진동에서 늑대별의 울음까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하는 겹눈의 시선
시인의 ‘겹눈’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붙잡기 어려운 미시의 시간부터 우주의 심연까지 상상력의 폭을 마음껏 넓히며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세슘 원자가 수십억 번 진동하는 찰나가 단 ‘1초’가 되고(「1초는」), 겨울 밤하늘에서 시퍼렇게 번득이는 시리우스는 지옥문을 지키는 ‘늑대별’이 되어 운다(「늑대별의 비밀」). 과학적 사실과 신화적 상상력이 포개지는 자리에서 시간과 공간의 익숙한 눈금은 새롭게, 나아가 낯설게 그려진다. 이러한 상상은 거대한 우주로부터 우리 삶의 가장 작은 장면들로까지 뻗어 나간다. 시인은 파란 가죽 필통 하나에서 양의 희생과 장인의 노동이 응축된 시간을 읽어 내고(「파란 가죽 필통」), 뜨거운 탕 속으로 들어가는 만두에게서는 삶의 비밀을 고민하는 철학자의 얼굴을 마주한다(「철학자」). 소나무 위 기름매미의 울음은 어느새 여름 방학에만 문을 여는 튀김 가게의 고소한 냄새가 되어 독자를 불러 세운다(「기름매미」). 여기에 어린이다운 천진함과 능청스러운 해학이 더해져 『레몬은 시다』의 세계가 한층 풍성해진다. 죽은 암탉을 기리며 “절대절대 닭국을 안 먹”겠다던 삼 남매의 비장한 맹세는 식욕 앞에서 흔들리고(「배신자」), 짝짓기 끝에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수컷 사마귀는 암컷 사마귀에게 보내는 연서에 서늘하고도 다정한 한 줄, “밥 든든히 먹고 나와”를 덧붙이며 독자에게 웃음과 긴장을 동시에 안긴다.
수컷 사마귀는 쪽지를 써 놓고 고민했다/암컷 사마귀를 사귀다 목이 잘리면 어쩌지?/그래서 한 줄을 더 썼다//우리 사귈래?/땅두릅 넓은 잎사귀에서 만나/밥 든든히 먹고 나와 _「우리 사귈래?」 부분
이처럼 미시 세계와 우주, 현실과 상상을 거침없이 오가는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사물의 표면 너머를 그려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익숙한 풍경 속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는 과정에서 어린이들은 세상을 한결 풍요롭고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눈을 얻을 것이다.
“딱딱한 뒤축에 발꿈치 까졌지만, 난 춤을 사랑했어”
흔들리는 몸과 마음에 건네는 다정한 안부
박정완의 동시는 자라면서 흔들리는 어린이를 가만히 감싸 안는다. 특히 우리 동시에서 상대적으로 드물게 다루어져 온 몸의 경험을 숨기거나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안녕! 난 브래지어야」에서 브래지어는 처음으로 브래지어를 입는 여자 어린이의 긴장을 풀어 주며 마음에 드는 속옷을 당당히 고르라고 북돋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입을 브라의 치수를 잘 아는 거야.”라는 브래지어의 말은 속옷을 고르는 일에만 머무르지 않는, 앞으로의 삶에서 ‘나다움’을 지켜 가라는 당부의 은유로도 읽힌다. 「손수건」에서는 초경을 겪은 소녀와 미래의 여성이 시간 너머로 손을 맞잡는다. 시인은 몸의 변화를 부끄러운 비밀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성장의 신호로 읽으며, 자라나는 어린이를 기꺼이 맞이한다. 이러한 환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타인을 향한 연대로 확장된다. 감염병으로 격리된 병실에서 정월 대보름날 부럼 까는 소리는 달님에게 보내는 ‘무전’이 되고(「정월 대보름」), 수혈관을 타고 핏방울이 “똑똑” 흐르는 소리는 낯선 두 사람을 맞닿게 한다(「수혈」). 멀리 떨어진 존재들을 이어 주는 이 연대의 마음은 삶의 비의(悲意)와 외로움까지 따뜻하게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 연대 감각은 마침내 자기 자신을 향한 긍정으로 피어난다. 「탭 댄서」의 ‘나’는 엄마가 일방적으로 안긴 꽃과 별 대신,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쥐여 준 말발굽 구두를 신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춤을 춘다.
엄마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들녘의 붉은 꽃으로 원피스를 만들어 주었지/노래 발표회 날,/붉은 꽃의 꽃가루 휘날리고//(…)난 노래 대신 재채기만 했지//엄마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밤하늘의 별로 머리띠를 만들어 주었지/(…)/머리띠의 별빛 눈부시고//……난 피아노 악보를 볼 수 없었지//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는/말발굽으로 구두를 만들어 주었지/(…)/딱딱한 뒤축에 발꿈치 까졌지만//(…)다다닥 닥닥 쿵쿵, 탭 댄스를 추었지//(…)/난 춤을 사랑했어 _「탭 댄서」 부분
몸의 변화를 긍정하고 타인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며 끝내 자기만의 가락을 찾아 가는 『레몬은 시다』 속 여정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해를 보기 위해 푹 눌러쓰는 “구멍 숭숭 밀짚모자”(「해를 보는 방법」)처럼, 이번 동시집이 어린이에게 그 구멍 너머의 새로운 풍경을 열어 보이는 렌즈이자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다정한 동행이 되어 줄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정완
2020년 제12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동시 부문, 2022년 제11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림책 『아기 쥐가 잠자러 가요』 『숲 속 약국 놀이』 『위대한 따라쟁이』, 동화 『다리 여섯 할머니와 툴툴 할아버지와 하얀 고양이와 책』, 동시집 『고양이 약제사』와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공저) 등을 냈습니다.
목 차
시인의 말|레몬은 시다
제1부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시
볼펜 | 이륙 | 밤의 색깔 | 파란 가죽 필통 | 밤에 휘파람을 불지 마 | 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 할머니 가방에 도마뱀이 있어 | 지네 화물차 | 레몬과 할머니 | 배신자 | 정월 대보름 | 별의별 이야기
제2부 어떻게 사랑을 말해?
1초는 | 초여름이다 | 누구랑 놀지 | 까마귀를 조심해 | 뿔 자랑 | 와글와글 병원 | 우리 사귈래? | 달팽이의 사랑법 | 해골 아이 | 내 이름은 크림 | 말할래 | 가장 슬픈 별 | 꼬리별의 노래
제3부 빨강이 떨어진다
소 나귀가 온다 | 파리의 골목 가게에서 | 손수건 | 안녕! 난 브래지어야 | 티티카카 호수를 아시나요 | 수혈 | 벌거숭이의 행진 | 메텔의 모자 | 늑대별의 비밀 | 푸른 커튼 | 하늘나라 하얀 구름 | 검은 소야
제4부 고맙다는 노랗고 뜨겁고
철학자 | 붉은 앵두를 먹을 때 | 기름매미 | 고구마 굽다 | 잡채 | 나는 심부름이야 | 우는 아이 잡아가는 파란 난쟁이들의 노래 | 땅꼬마 완두콩 | 입이 무거운 사람 | 빨강 원피스 | 변신 엄마 | 탭 댄서 | 해를 보는 방법
해설|언어의 틈새에서 발견하는 온기_김제곤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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