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적자도 장자도 아니지만 보위에 오르다
광해군을 괴롭힌 트라우마
선조와 의인왕후는 혼인한 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대군이 없으면 군이라도 하루빨리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선조는 탐탁지 않게 여기고 후계자 선정에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발한 임진왜란은 선조로서도 더 이상 후계자 선정을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침내 선조와 신료들의 합의에 따라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아들로, 적자도 아니고 맏아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조의 여러 왕자들 가운데 광해군은 가장 총명하고 어진 성품으로 신료들의 신망을 받았다. 왜군이 한양까지 점령한 상황에서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의사를 내비쳤으나 세자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하여 전쟁터를 누비며 무군 활동을 벌였다. 광해군의 분조가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아니나 망명 계획을 세우는 선조의 행궁에 비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일조했고, 이는 국왕으로서 선조의 견제 심리를 자극했다. 선조는 전쟁 기간 중 20여 차례에 이르는 양위 소동을 벌였는데, 실제로 광해군에게 양위할 생각은 없었다. 선조의 양위 소동이 벌어질 때마다 세자 광해군은 엎드려 죄를 청하는 수밖에 없었고, 분조를 이끈다고는 하나 실권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출생서열이 왕위에 오르는 데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선조만 해도 명종의 적장자도 아니요, 명종의 이복형인 덕흥군의 막내아들이었다. 광해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문제는 왜란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군신 간의 합의에 따라 광해군이 세자 자리에 오른 이상 정국의 변화에 따라 세자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 사회에서 왕세자의 지위를 튼튼하게 해주는 요소는 첫째 왕의 신임, 둘째 종법상의 정통성, 셋째 신료들의 지지, 넷째 명 황제의 책봉인데, 이 가운데 광해군은 왕의 신임과 명 황제의 책봉 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세자로 있는 16년 동안 광해군은 명으로부터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책봉을 거절당했고, 선조는 명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한 세자는 세자도 아니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선조의 지나친 견제와 홀대, 영창대군 탄생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유영경 등 일파가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려는 시도 등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험난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니라는 비아냥 섞인 뭇 시선은 세자 시절을 거쳐 왕위에 오른 광해군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았고, 종국에는 자신의 어머니 공빈을 왕후로 추숭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으로까지 몰고 간다.
광해군 대 조정을 달군 두 논쟁
인목대비 폐위 논쟁과 후금과의 외교 문제
1623년 계해정변(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낸 양대 명분 중 하나는 폐모(廢母), 즉 모후 인목대비를 폐하려 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배명(背明), 즉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것이었다. 특히 폐모 문제는 광해군의 재위 기간(1608~1623) 내내 조정을 뜨겁게 달구었고, 이후 조선 사회의 장기적 진화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목대비 폐위 논쟁은 계축옥사 기간 중에 한 번, 공빈을 공성왕후로 추숭한 뒤 또 한 번, 두 차례에 걸쳐 조정을 뜨겁게 달구었다. 거의 모든 신료가 광해군의 수의(收議)에 참여하여 폐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출해야만 했다. 게다가 단지 서면으로만 의견 제출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 사례를 전거로 들이대며 각자가 내세우는 주장의 합당함을 강변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정청을 유도해내며, 신료들을 좌지우지했다.(저자는 광해군이 당파 싸움에 희생당했다거나 신료들에게 끌려다녔다는 기존의 일부 학설을 비판한다.)
1613년 일어난 계축옥사는 김제남의 역모, 영창대군 추대, 그리고 인목대비의 내응이라는 세 개의 주요 혐의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계축옥사의 불똥이 인목대비에게로 튀면서 대비 처벌 문제를 놓고 폐위론자와 폐위반대론자는 약 10년에 걸쳐 치열하게 싸웠다. 광해군은 계축옥사 기간 중에 대북 일파가 김제남의 역모에 내응하여 저주 행위를 한 인목대비를 처벌해야 한다고 할 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윤허하지 않았다. 왕위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만한 존재인 영창대군 제거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광해군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사안으로 넘기지도 않았다. 계축옥사를 완전히 마무리 짓기 위해 광해군은 인목대비 관련 교서를 반포했다. 인목대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비전 나인들의 저주 행위를 적시한 교서 반포는 누가 보아도 인목대비의 죄를 공개적으로 밝힌 거나 다름없었다.
세자 시절 16년 동안 다섯 차례나 명으로부터 세자 책봉을 거부당하고(이는 순전히 명나라 내부 문제로 인한 거절이었지만, 조선의 국왕 중 누구도 이렇게 여러 차례 거절당한 사례가 없었다), 심지어 왕위에 올라서도 한 차례 더 거부당한 뒤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 공빈을 왕후로 추숭하는 사업을 통해 약점을 극복하려 했고, 신료들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며 기어코 공빈의 왕후 추숭을 이루어냈다. 이로써 광해군은 서자, 그것도 중자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닌 선조의 두 번째 왕비 공성왕후에게서 태어난 적자로, 다시 말해 명실상부하게 대군의 지위로 왕위에 오른 셈이 되었다. 또한 인목대비는 왕비 서열상으로 세 번째이며, 광해군에게 모후라기보다는 아홉 살이나 어린 한갓 어린 계모로 새롭게 자리매김되었다.
바로 그즈음 인목대비를 폐위해야 한다는 상소가 광해군의 집무 책상에 빗발치듯 올라왔다. 한양에 거주하는 유생들이 올린 이 상소는 허균의 식객 또는 문객이었다. 즉, 이 폐위 상소의 배후에는 허균이 있었고, 허균의 뒤에는 광해군이 있었다.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신료들은 문외출송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인목대비 폐위 문제와 함께 광해군 대 조정을 시끄럽게 만든 또 하나의 사안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취할 외교적 태도였다. 명의 칭병 칙서를 받지 않고 후금의 누르하치와 대화를 추구한 광해군의 노선은 당시 양반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자신의 세자 책봉을 수차례 거절한 명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는 광해군으로서는 후금과 우호 관계를 갖는 것이 후금의 위협에서 종묘사직을 지켜내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유교의 핵심 양대 가치―충과 효
충이 먼저인가, 효가 먼저인가
조선은 유교를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이며, 유교의 핵심 가치는 충과 효이다. 이 두 가지 가치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 정치 무대에서 이 둘의 가치가 맞부딪친다면? 인목대비 폐위 논쟁은 바로 충과 효가 조선의 정치 무대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사례이다. 성리학적 테두리 안에서 얼마든지 토론 가능한 주제였던 충과 효의 논쟁 승부는 무력을 동원한 정치 행위로 결판이 나버렸다.
인목대비 폐위 논쟁은 계축옥사에 인목대비가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촉발되었다. 논쟁은 인목대비에게 정말로 혐의가 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가 아니었다. 혐의가 날조라고 믿을지라도 섣불리 그것을 국왕 앞에서 공개적으로 피력하기는 어려웠다. 하여 논쟁은 어떠한 경우에도(설령 대비가 실제로 저주 행위를 하고 김제남의 역모에 내응했다고 해도) 자식이 어머니를 벌할 수 없다는 폐위반대론과, 왕은 사인이 아닌 공인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충은 모든 가치에 우선하며 모자간의 의리(효)보다는 군신 간의 의리(충)가 더 중요하다는 폐위론의 충돌로 발전했다.
인목대비 폐위론자들과 폐위반대론자들은 중국의 유사 선례를 경쟁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고 상대방을 공격했다. 사헌부·사간원의 양사, 홍문관, 이항복, 기자헌, 정인홍, 관학 유생들이 중국 전설시대의 순, 춘추시대의 문강과 애강, 당나라의 무태후와 장황후 사례 등 중국의 여러 사례를 전거로 들면서 충과 효의 문제를 다투었다.
계축옥사를 시작으로 약 5년에 걸쳐 폐위론자들은 반대론자들을 거의 일망타진하다시피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불과 5년 후 계해정변(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했다. 정변(반정)을 계기로 이번에는 폐위반대론자들이 폐위론자들을 사실상 정계에서 발본색원해버렸다. 이로써 충에 대해 효가 완승하여 충이라는 가치는 점차 형해화하고 효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이제 효가 모든 가치의 우선순위가 되었고 조선은 ‘효치국가’의 길로 들어섰다.
작가 소개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맥락에서 보는 조선시대 정치·지성사와 한중관계사를 전공하였다. 특히 양반 지식인들의 중화 인식과 유교의 한국적 특성이 결합하여 조선을 빚어낸 과정과 그 역사적 유산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양태에 관심이 많다. 대표 저서로는 『중종의 시대: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정지된 시간: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등이 있다. 역주서로는 A Korean Scholar’s Rude Awakening in Qing China, 『북정록』 등이 있다.
목 차
1장. 프롤로그: 17세기 초 인목대비 폐위 논쟁의 중요성
01. 인목대비 폐위 논쟁 관련 기존 연구 검토
02. 이 책의 구성과 내용
2장. 세자 광해군: 용상을 향한 멀고도 험한 길, 1592~1608
01. 세자 책봉 과정
02. 세자 광해군과 국왕 선조
03. 세자 광해군과 대군 영창
04. 세자 때 경험의 의미
3장. 국왕 광해군의 왕위계승 경쟁자 제거, 1608~1613
01. 장자 임해군 제거
02. 계축옥사의 전개 추이
03. 인목대비, 계축옥사의 돌발 변수
04. 적자 영창대군 제거
4장. 영창대군 제거의 후유증과 제1차 폐위 논쟁, 1613~1615
01. 정온의 사직 상소와 광해군의 친국
02. 정온 처벌의 여파
03. 인목대비 관련 교서 반포와 폐위 논쟁의 점화
04. 광해군의 언관 제압 추이
5장. 생모 추숭: 공성왕후와 인목대비, 1610~1617
01. 추숭을 둘러싼 조정 논쟁과 절충안
02. 절충안의 파기와 광해군의 전략
03. 논쟁의 전환점과 추숭의 완결
04. 광해군의 모후
6장. 제2차 폐위 논쟁과 광해군의 복안, 1617~1618
01. 유생들의 대비 폐위 상소와 그 배후
02. 신덕왕후 사례와 광해군의 생각
03. 대비 폐위 정청과 광해군의 역할
04. 대비의 유폐와 광해군의 의도
7장. 중국 사례 인용과 논쟁의 성격
01. 전설시대의 순과 고수
02. 춘추시대의 문강과 애강
03. 한나라의 염태후
04. 진나라의 양태후
05. 당나라의 무태후
06. 당나라의 장황후
07. 논쟁의 역사적 성격
8장. 반정의 명분과 폐모론의 강화
01. 정변 당사자들의 거사 동기
02. 반정교서에서 밝힌 거사 명분
03. 조선 후기 저술에 나타난 명분 인식
04. 명분의 조정과 그 유산
9장. 에필로그: 충의 관념화와 ‘효치국가’의 탄생
01. 충과 효가 상충할 때
02. 이 책의 핵심 내용 정리
03. 효치국가의 탄생과 조선 후기의 왕권
04. 폐위 논쟁의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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