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표절(剽竊)이란 다른 사람이 쓴 문학작품이나 학술논문, 또는 기타 각종 글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직접 베끼거나 아니면 관념을 모방하면서,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산물인 것처럼 공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위키백과
2015년 신경숙의 표절 논란과 그 이후
신경숙의 단편 중 한 문단이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중 한 문단을(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을 김후란이 한국어로 번역한 문단을) 베꼈다는 고발 때문에 2015년 여름에 (새삼스럽게) 논란이 있었다. 신경숙이 문제된 그 단어들을 베껴다 썼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지만,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한국 사회는 쓸데없는 시간을 몇 달이나 허비했고, 당시 신경숙에 대한 변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렇게 탈바꿈했다. ① 신경숙은 미시마의 「우국」을 본 기억이 없다. ②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베낀 것은 아니다. 필기장에 기록해 둔 내용 또는 기억 속에 저장된 내용을 부주의하게 사용했을 뿐이다. ③ 전체적으로 다른 작품인데 부분적으로 겹친다는 것만으로 표절이라는 낙인을 찍으면 되느냐. ④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첨병 노릇을 하고 있는 작가를 이 정도 일로 쓰러뜨릴 수 있느냐. ③과 ④는 표절이지만 덮고 넘어가자는 뜻이고, ②는 표절이지만 의도적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며, ①은 베낀 것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라는 뜻이다.
‘혼성모방 기법’이라는 짜깁기
신경숙과 관련된 논란의 와중에는 모방 아닌 문학이 어디 있느냐는 소리도 제법 많이 나왔다. 이런 소리는 옛날부터 있던 것이지만, 옛날에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오만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면, 요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간판 아래 모방과 창작의 경계 자체를 부인하는 뻔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1992년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류철균이 발표한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공지영,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류철균은 이후 자신의 소설은 다른 작품을 2차 텍스트로 만든 ‘혼성모방 기법’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한국일보 2017. 8. 14). “해 아래 새것”이 있을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질문은 나름대로 따져 물을 가치가 있지만, 남에게서 영감이나 영향을 받은 경우와 남의 공로를 가로챈 경우를 어떻게 분간하느냐는 질문은 전혀 다른 질문이다.
표절의 패턴
재밌는 점은 이런 식의 둘러대기와 어쭙잖은 완벽주의는 영문학의 역사에서도 표절과 관련해서 늘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이다. 문장의 일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잡아뗀다 ―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일치가 드러나면, 필기장 또는 무의식적 기억을 핑계로 댄다 ― 그래도 안 된다면, 글 전체에서 표절은 일부였다고 변명한다. 이 책의 저자 맬런은 이런 식의 둘러대기가 표절범들의 변명에서 하나의 패턴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유머가 가득하다. 표절이 도벽처럼 중독성이라든지, 들키기를 바라는 듯 숱한 단서들을 뻔하게 남겨 둔다는 등, 표절범의 불가해한 의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표절의 탄생
표절이라는 개념은 인쇄술의 발전 및 출판업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책이 귀하던 시절에는 남이 쓴 문장을 암송하는 것이 훌륭한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동양의 경우, 주희의 『근사록』이나 이율곡의 『격몽요결』은 인용문들의 조합일 뿐이다. 책을 펴내서 돈을 번다는 발상을 수치스러운 타기의 대상으로 여기던 시절에는, 헛소리를 자기 이름으로 내놓기보다는 선인의 훌륭한 말씀을 모방하고 반복하는 편이 낫다고들 생각했다. 독창성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되고, 덧붙여 돈벌이로까지 연결되는 현상은 근대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예술적/학문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가 뒤섞이지 말아야 한다는 형태의 정서로서, 근대성을 마냥 수용할 수만은 없다는 거부감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 한구석에는 남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표절을 비난하면서도, 막상 무엇이 표절인지, 그리고 표절을 어떻게 징계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번번이 머뭇거린다.
표절의 기준
한국 사회에서는 최근 10여 년 사이에 표절 논란이 부쩍 늘어났다. 이 논란은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 증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절을 가려내는 기준은 점점 더 불투명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만큼 표절을 가려내는 기준이 절실하게 필요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영감, 영향, 모방, 차용, 변용 등과 표절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맬런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례들은 이러한 분간을 위해 유용한 재료가 되길 바란다.
‘1장 흔한 생각, 전에 사용된 표현’에서는 17세기에 표절의 기본이 발생하게 된 연유와 로렌스 스턴이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위상이 어떻게 깎이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심에, 또는 당장 몇 푼의 원고료를 위해 글을 써야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남의 글을 적당히 변조하고 짜깁기해서 그럴듯한 작품 하나를 엮어낸 콜리지는 상습적인 표절을 한 사례이다.
‘2장 선량한 리드’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로 국제저작권 제도의 옹호자이면서 동시에 공격적인 표절범이었던 찰스 리드의 허황한 삶과 작품을 다룬다. ‘3장 엡스타인 보고서’에서는 젊은 작가 제이콥 엡스타인의 주목받는 처녀작에서 재치 있는 문장 여럿이 우리에게도 『런던 필즈』의 작가로 잘 알려진 마틴 에이미스의 책에서 훔친 것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사연이다. ‘4장 학자들의 침묵’은 젊은 역사학 교수의 저술의 상당수가 표절의 결과였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전문가들이 “표절”이라는 판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림으로써 큰 소문 없이 텍사스 이공대학교에서 조용히 사임하고 다른 곳에 자리 잡은 사연이다. ‘5장 짓밟힌 포도 농장’은 캘리포니아 포도 농장에 관한 소설을 쓴 작가가 CBS-TV와 드라마 <<팰컨 크레스트>>의 제작진을 고소한 사건이다. 드라마의 제작 과정 전체에서 콘펠드의 소설을 군데군데 참고하고 차용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콘펠드의 저작권은 법정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학술적인 저술에서는 다른 사람의 연구 성과를 마치 자기 것인 양 말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표절이다. 마땅히 출전을 표시해서 원저자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대목에서, 그런 작업을 생략해버리면 그 공로를 가로채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출전만 충실하게 표시하면 표절이 아닌 것일까?
다른 사람들의 연구에서 여기저기 따다가 짜깁기로 일관하든가, 다른 사람들이 이미 했던 얘기들을 표현만 바꿔서 반복하는 경우, 만약 출전을 밝히지 않고 그랬다면 기본적인 형태의 표절에 해당한다. 만일 출전을 충실히 밝히면서 그랬다면, 공로를 가로챈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표절이라기보다는 연구 성과로 봐줄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정해야 할 것이지만, 통상적으로는 표절로 간주된다. 남의 성과들을 가져다가 대충 모아놓고서 거기에 마치 자기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듯이 포장한 셈이기 때문이다.
조경란과 신경숙이 표절 논란의 주제가 되었고, 장관 인사를 위한 청문회에서는 표절을 둘러싼 공방이 단골 메뉴 중 하나지만, 깔끔하게 진상이 정리되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는 지금 표절을 허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그래서 정직한 글쓰기가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일까?
작가 소개
저자 : 토머스 맬런
미국의 소설가, 수필가, 비평가다. 뉴욕 주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영문학을 전공하여 브라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배서 칼리지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고, <<계간 신사Gentleman’s Quarterly>>의 편집자와 <미국인문학위원회National Coucil on the Humanities> 위원, <전미인문학기금National Endowments for the Humanities>의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12년 <미국예술과학원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근처에 있다가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역사소설로 주목을 받았는데, 『헨리와 클라라Henry and Clara』, 『두 개의 달Two Moons』, 『듀이가 트루먼을 꺾다Dewey Defeats Truman』, 『오로라 7Aurora 7』, 『밴드박스Bandbox』, 『여행 동무Fellow Travelers』, 『워터게이트Watergate』, 『피날레Finale』가 그의 소설 작품이다. 논픽션으로는 『표절, 남의 글을 훔치다』 외에, 일기들에 관한 『자신에 관한 책A Book of Ones’ Own』, 편지들에 관한 『여불비례Yours Ever』, 케네디 암살에 관한 『페인 여사의 차고Mrs. Paine’s Garage』와 두 권의 수필집이 있다.
목 차
초판 머리말
제1장 흔한 생각, 전에 사용된 표현: 고전 시대의 모방에서부터 국제 저작권까지
제2장 선량한 리드: 비행(非行) 그리고 『마드무아젤 드 말페르』
제3장 엡스타인 보고서: 두 번째 처녀작
제4장 학자들의 침묵: 학계에서 일어난 사건
제5장 짓밟힌 포도 농장: <<팰컨 크레스트>>를 둘러싼 싸움
맺음말
제2판에 붙인 후기
옮기고 나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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