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 산책 문학의 거장, 가후
가후는 도쿄의 마을을 즐겨 걸었다. 태어난 고이시카와를 비롯한 야마노테(고지대 마을) 지역뿐만 아니라 스미다 강가 시타마치(저지대 서민마을), 강 동쪽인 무코지마, 혼조나 후카가와까지 발길이 닿았다. 도쿄의 끝자락 아라카와 방수로도 찾아 둘러봤다. 그의 산책 범위는 도쿄 마을 걷기가 유행인 오늘날 못지않게 넓다. 도쿄 마을을 그만큼 산책한 문학자는 이제껏 없다. 가후가 존경한 모리 오가이도 산책을 즐겼지만 집 주변 마을들에 그쳤다. 그에 비해 가후는 박쥐우산을 지팡이 삼아 걷거나 때론 전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도쿄 전 지역을 누비며 손수 지도를 그리고 글을 남겼다. 산책이라기 보단 마을 관찰 여행에 가까웠다. 그를 두고 ‘산책 문학의 거장’이라 칭하고, 도쿄인들이 여전히 ‘가후산책’을 즐기는 이유다.
▶ 근대 도시 도쿄를 향한 외침
“오늘날에 이르러 침묵은 죽음을 맞이했다.”
옆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질린 나머지 집을 뛰쳐나가며 가후가 던진 말이다. 가후가 『히요리게다』를 쓰기 시작한 것은, 미국과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다이쇼(1910년대) 초였다. 그즈음 도쿄는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어 차례차례 옛것, 헌것을 부수고 그 자리에 새것을 들여놓고 있었다. 어제 본 작은 골목은 신작로로, 전통 건물은 현대 건물로 바뀌기 일쑤였다. 그 모습에 가후는 놀라고 안타까워했다. 과연 도시 도쿄가 가는 이 길이 옳은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걷고 또 걸으며 문장을 완성했다. 적어도 문학자 가운데 한 명은 ‘있어야 할 도쿄 모습’, ‘지금 좋은 도쿄 모습’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날카로운 문학적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회화적 표현이 돋보이는 그의 수필이 그저 산책 수필이나 도쿄 안내서에서 끝나지 않는 것은, 그 바탕에 근대화 물결에 휘둘리는 서민의 우수에 찬 삶이 밀레의 그림을 보듯 묘사되어 있어서다.
‘현대 일본의 개화’라는 강연에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일본의 자세에 있어 외발(外發)적 개화에 따르지 않는 내발(內發)적 개화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표면적인 개화일 뿐, 알맹이는 안중에 없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슬렁어슬렁 산책이나 하자고?
그래, 나는 자유인이니까.
▶ 가후는 단순한 에도학자도, 서양학자도 아니다. 자유인이다.
“나는 그저 목적 없이 느릿느릿 걸으며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겠다. 집에 앉아 집사람 히스테리 부리는 얼굴을 보며 세상만사 덧없음을 느끼고, 신문사 잡지사 기자들 습격을 받아 모처럼 청소해둔 화로를 꽁초의 섬으로 만드느니, 차라리 여유 있을 때 집을 나서 산책이나 하는 것이 낫다. 걷자, 걸어보자.”
가후는 1905년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하고 공부할 기회를 갖는다. 귀국 후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 대학 문학부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치며 보들레르 등 프랑스 근대 시인의 시집을 번역했다. 그렇다고 가후를 서양학자라고 말할 순 없다. 또 에도를 그리워하며 에도 정서를 담은 작품을 많이 썼다고 해서 에도학자라고도 말할 순 없다. 가후가 진정 원한 것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어슬렁어슬렁 걷기에 나선다. 그리고 쓸모없는 것을 찾아 쓴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만의 방식대로 호소한다. 산책은 단독 행위이지 않은가. 혼자서, 오롯이 나홀로 시간을 보내며 고독을 즐길 수 있다. 가후에게 있어 산책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누리는 고독한 문학적 행위나 다름없었다.
▶ 가후의 산책 길동무, 박쥐우산과 에도지도
“남달리 키가 큰데도 나는 항상 히요리게다를 신고 박쥐우산을 들고 걷는다.”
미국과 프랑스 유학생활의 영향이었을까? 가후의 평소 옷차림은 박쥐우산을 든 양복 차림이다. 그러나 산책을 나설 때면 일본 땅에 맞는 ‘히요리게다’를 신고 당시 도쿄지도가 아닌 옛 에도지도를 품에 넣었다. 히요리게다는 맑은 날 신는 게다인데 갈아 끼우는 굽이 다소 낮은 것이 특징이다. 우에노와 같이 벚꽃이 피는 곳에는 벚꽃을, 야나기하라처럼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는 버드나무 실가지를 그려 넣은 에도지도는 다소 부정확하지만 신식 도쿄지도보다 훨씬 직감적이다. 가후는 별난 모양새답게 당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도쿄의 틈새와 수수한 생명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도쿄가 도쿄로 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데 필요했으리라.
▶ 군국주의 조국을 비판하는 작가, 가후
가후를 ''에도 문화에 탐닉한 반시대적 문명비평가‘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가후가 누구보다도 시대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졌음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게이오 대학 통근 길에 천황을 암살하려던 대역 사건의 죄인 호송차를 보면서 작가로서의 무능함에 괴로워한다. 드레퓌스 사건 때의 에밀 졸라가 떠올라서다.
가후에게는 『단장정일승?腸亭日?』이라는 일기가 있다. 쇼와 11년(1936) 4월 13일자에 “오사카 어느 부두의 아동보관소에서 일본인 아이가 물건을 훔쳤다고 조선인 아이를 묶어 거꾸로 달고 때린 후 이불에 싸서, 그 위에서 모두 밟아 죽인 기사가 있다. 아이는 열 살도 되지 않았다. 무섭다, 무섭다, 아아 무서울 뿐이다.”라고 쓰고 있다. 가후는 아이들의 의식 속에 조선인이라면 죽여도 좋다는 조선인 멸시관이 깊이 뿌리박힌 현실이 무섭다고 느낀 것이다.
“일본군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인의와 자애의 마음을 저버린 행동이다. 이러한 무자비한 행동은 머지않아 일본 국내 각 개인의 성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터다. 암묵적으로 강도를 좋은 것이라 가르치는 것과 같다.”라는 기록도 있다.
또 가후는 말년에 문화훈장을 받고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는데, 그 이후에 보란 듯이 반라의 무희들 무리 속에 웃고 있는 사진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약자에게 이익이 되는 시대가 언제 있기는 했는가.”
??? 나가이 가후를 사랑한 작가
▶ 다니자키 준이치로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나가이 가후의 『아메리카 이야기あめりか物語』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그는 가후 문학에서 자신의 예술상의 혈족을 느꼈고, 흔들리던 그의 문학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고백한다. 후에 나가이 가후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한다.
“나는 장래에 문단에 나갈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가후에게 인정받고 싶다 생각했고 언제나 그런 날이 오리라고 꿈같은 공상에 빠지기도 했다.”
▶ 미시마 유키오
노벨상 후보에도 오른 미시마 유키오는 할머니 나쓰코의 친가인 나가이 집안과 서로 동족이다. 나쓰코의 9대 조인 나가이 히사마사의 이복형 나가이 마사나오가 가후의 12대 조가 된다. 아버지 아즈사의 풍모는 가후와 흡사한 부분이 있어서, 미시마는 아버지를 은근히 ‘가후 선생’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 이노우에 히사시
일본을 대표하는 극작가인 이노우에 히사시는 가후를 동경하여 연극 무대와 연을 맺게 됐는데, 문학청년이던 시절 아사쿠사에서 가후를 만난 일을 평생 자랑거리로 삼았다. 특히 가후의 일기 『단장정일승』은 일본어가 존재하는 한 반드시 읽어야 할 문장이라고 예찬했다.
▶ 에드워드 G. 사이덴스티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영어로 번역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Kafu the Scribbler』(1965)를 통해 가후의 작품들이 서양에도 많이 알려졌다며, 도쿄 역사를 다룬 『도쿄이야기』를 가후에게 헌정한다. “가후를 일반적으로 호색적인 작가라고 생각들 하지만, 가후 작품의 본질은 향수와 만가에 있다. 홍등가는 에도 문화의 중심이었다. 에도의 잔재가 아직 살아 있다면, 보수적인 화류계뿐이었다. 그러니 가후가 화류계를 즐겨 묘사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 최명희
최명희 작가의 『혼불』에도 인용되지 않았던가.
“오유끼… 좋은 이름인데…? 나가이 가후의 여인이로구나.”
오유끼는 그 허무한 냉소주의자 나가이 가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였다. 일찍이 히로쓰 류로의 문하에 들어가 습작을 한 그는 일본 고래의 춤과 피리, 만담 등을 공부하다가, 1903년에는 미국으로, 또 4년 후에는 프랑스로 마음껏 떠돌던 사람. - 『혼불』 중에서
▣ 작가 소개
저 : 나가이 가후
永井荷風
1879~1959.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 한시 시인이자 관료인 아버지 나가이 규이치로와 한문학자 와시쓰 기도의 차녀 쓰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소키치, 호는 가후. 다른 필명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딴 단장정주인?腸亭主人, 긴푸산진金阜山人 등이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1903년에 미국에서 일하다가, 1907년에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건너가 자연주의 문학에 매료된다. 귀국 후 『아메리카 이야기あめりか物語』 『프랑스 이야기ふらんす物語』 등 여러 작품을 출간했으나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이어 발매금지 당했다. 1909년에 나쓰메 소세키의 요청으로 <도쿄아사히신문>에 「냉소冷笑」를 연재했으며, 1910년에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대 문학과 교수가 됐다. 그러나 천황을 암살하려는 대역 사건을 보며 문학가로서 무력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뒤 주로 화류계를 배경으로 사라져가는 에도의 정서를 묘사하는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또 「히요리게다日和下?」를 비롯해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망가져가는 도시 도쿄를 안타까워하며 골목과 공터, 언덕과 강 등을 느릿느릿 산책하며 손수 지도를 만들고 글을 남겨... 1879~1959.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 한시 시인이자 관료인 아버지 나가이 규이치로와 한문학자 와시쓰 기도의 차녀 쓰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소키치, 호는 가후. 다른 필명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딴 단장정주인?腸亭主人, 긴푸산진金阜山人 등이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1903년에 미국에서 일하다가, 1907년에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건너가 자연주의 문학에 매료된다. 귀국 후 『아메리카 이야기あめりか物語』 『프랑스 이야기ふらんす物語』 등 여러 작품을 출간했으나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이어 발매금지 당했다. 1909년에 나쓰메 소세키의 요청으로 <도쿄아사히신문>에 「냉소冷笑」를 연재했으며, 1910년에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대 문학과 교수가 됐다. 그러나 천황을 암살하려는 대역 사건을 보며 문학가로서 무력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뒤 주로 화류계를 배경으로 사라져가는 에도의 정서를 묘사하는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또 「히요리게다日和下?」를 비롯해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망가져가는 도시 도쿄를 안타까워하며 골목과 공터, 언덕과 강 등을 느릿느릿 산책하며 손수 지도를 만들고 글을 남겨 ‘산책 예찬론자’로 불린다. 1952년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54년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대표 저서로는 『지옥의 꽃地獄の花』(1902) 『꿈의 여인夢の女』(1903) 『스미다 강すみだ川』(1911) 『에도예술론江?藝術論』(1920) 『장마 전후つゆのあとさき』(1931) 『강 동쪽의 기담?東綺譚』(1937) 『단장정일승?腸亭日?』(전7권, 1958) 등이 있다.
역 : 정수윤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방송 작가와 기업체 홍보실 사보 기자로 일하다가, 일본 대중 소설에 관심을 갖고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와세다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에 입학해 ‘에도가와 람포와 그로테스크 문학’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 야나카 마을의 옥탑방에서 지내던 당시, 함께 살던 모기, 거미, 바퀴벌레와 이름 모를 곤충들에게 영감을 얻어 《모기소녀》를 집필했다.
▣ 주요 목차
히요리게다
서문 9
히요리게다 11
사당 24
나무 27
지도 36
절 42
물 그리고 나룻배 53
골목 69
공터 75
벼랑 93
언덕 106
석양 그리고 후지 산 풍경 113
그 밖의 산책 수필
우에노 122
백화원 139
후카가와 산보 146
부록
『히요리게다』 해설 162
도쿄의 변천 : 에도부터 헤이세이까지 170
주요 산책 지도 178
연보 : 나가이 가후 생애 및 산책로 192
역자 후기 : 도시 서울 애상 212
▶ 산책 문학의 거장, 가후
가후는 도쿄의 마을을 즐겨 걸었다. 태어난 고이시카와를 비롯한 야마노테(고지대 마을) 지역뿐만 아니라 스미다 강가 시타마치(저지대 서민마을), 강 동쪽인 무코지마, 혼조나 후카가와까지 발길이 닿았다. 도쿄의 끝자락 아라카와 방수로도 찾아 둘러봤다. 그의 산책 범위는 도쿄 마을 걷기가 유행인 오늘날 못지않게 넓다. 도쿄 마을을 그만큼 산책한 문학자는 이제껏 없다. 가후가 존경한 모리 오가이도 산책을 즐겼지만 집 주변 마을들에 그쳤다. 그에 비해 가후는 박쥐우산을 지팡이 삼아 걷거나 때론 전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도쿄 전 지역을 누비며 손수 지도를 그리고 글을 남겼다. 산책이라기 보단 마을 관찰 여행에 가까웠다. 그를 두고 ‘산책 문학의 거장’이라 칭하고, 도쿄인들이 여전히 ‘가후산책’을 즐기는 이유다.
▶ 근대 도시 도쿄를 향한 외침
“오늘날에 이르러 침묵은 죽음을 맞이했다.”
옆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질린 나머지 집을 뛰쳐나가며 가후가 던진 말이다. 가후가 『히요리게다』를 쓰기 시작한 것은, 미국과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다이쇼(1910년대) 초였다. 그즈음 도쿄는 메이지유신 이후 급격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어 차례차례 옛것, 헌것을 부수고 그 자리에 새것을 들여놓고 있었다. 어제 본 작은 골목은 신작로로, 전통 건물은 현대 건물로 바뀌기 일쑤였다. 그 모습에 가후는 놀라고 안타까워했다. 과연 도시 도쿄가 가는 이 길이 옳은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걷고 또 걸으며 문장을 완성했다. 적어도 문학자 가운데 한 명은 ‘있어야 할 도쿄 모습’, ‘지금 좋은 도쿄 모습’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날카로운 문학적 상상력과 자유분방한 회화적 표현이 돋보이는 그의 수필이 그저 산책 수필이나 도쿄 안내서에서 끝나지 않는 것은, 그 바탕에 근대화 물결에 휘둘리는 서민의 우수에 찬 삶이 밀레의 그림을 보듯 묘사되어 있어서다.
‘현대 일본의 개화’라는 강연에서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일본의 자세에 있어 외발(外發)적 개화에 따르지 않는 내발(內發)적 개화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표면적인 개화일 뿐, 알맹이는 안중에 없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슬렁어슬렁 산책이나 하자고?
그래, 나는 자유인이니까.
▶ 가후는 단순한 에도학자도, 서양학자도 아니다. 자유인이다.
“나는 그저 목적 없이 느릿느릿 걸으며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겠다. 집에 앉아 집사람 히스테리 부리는 얼굴을 보며 세상만사 덧없음을 느끼고, 신문사 잡지사 기자들 습격을 받아 모처럼 청소해둔 화로를 꽁초의 섬으로 만드느니, 차라리 여유 있을 때 집을 나서 산책이나 하는 것이 낫다. 걷자, 걸어보자.”
가후는 1905년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하고 공부할 기회를 갖는다. 귀국 후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 대학 문학부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치며 보들레르 등 프랑스 근대 시인의 시집을 번역했다. 그렇다고 가후를 서양학자라고 말할 순 없다. 또 에도를 그리워하며 에도 정서를 담은 작품을 많이 썼다고 해서 에도학자라고도 말할 순 없다. 가후가 진정 원한 것은 자유인으로서의 삶이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어슬렁어슬렁 걷기에 나선다. 그리고 쓸모없는 것을 찾아 쓴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만의 방식대로 호소한다. 산책은 단독 행위이지 않은가. 혼자서, 오롯이 나홀로 시간을 보내며 고독을 즐길 수 있다. 가후에게 있어 산책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누리는 고독한 문학적 행위나 다름없었다.
▶ 가후의 산책 길동무, 박쥐우산과 에도지도
“남달리 키가 큰데도 나는 항상 히요리게다를 신고 박쥐우산을 들고 걷는다.”
미국과 프랑스 유학생활의 영향이었을까? 가후의 평소 옷차림은 박쥐우산을 든 양복 차림이다. 그러나 산책을 나설 때면 일본 땅에 맞는 ‘히요리게다’를 신고 당시 도쿄지도가 아닌 옛 에도지도를 품에 넣었다. 히요리게다는 맑은 날 신는 게다인데 갈아 끼우는 굽이 다소 낮은 것이 특징이다. 우에노와 같이 벚꽃이 피는 곳에는 벚꽃을, 야나기하라처럼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는 버드나무 실가지를 그려 넣은 에도지도는 다소 부정확하지만 신식 도쿄지도보다 훨씬 직감적이다. 가후는 별난 모양새답게 당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도쿄의 틈새와 수수한 생명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도쿄가 도쿄로 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데 필요했으리라.
▶ 군국주의 조국을 비판하는 작가, 가후
가후를 ''에도 문화에 탐닉한 반시대적 문명비평가‘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가후가 누구보다도 시대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졌음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게이오 대학 통근 길에 천황을 암살하려던 대역 사건의 죄인 호송차를 보면서 작가로서의 무능함에 괴로워한다. 드레퓌스 사건 때의 에밀 졸라가 떠올라서다.
가후에게는 『단장정일승?腸亭日?』이라는 일기가 있다. 쇼와 11년(1936) 4월 13일자에 “오사카 어느 부두의 아동보관소에서 일본인 아이가 물건을 훔쳤다고 조선인 아이를 묶어 거꾸로 달고 때린 후 이불에 싸서, 그 위에서 모두 밟아 죽인 기사가 있다. 아이는 열 살도 되지 않았다. 무섭다, 무섭다, 아아 무서울 뿐이다.”라고 쓰고 있다. 가후는 아이들의 의식 속에 조선인이라면 죽여도 좋다는 조선인 멸시관이 깊이 뿌리박힌 현실이 무섭다고 느낀 것이다.
“일본군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인의와 자애의 마음을 저버린 행동이다. 이러한 무자비한 행동은 머지않아 일본 국내 각 개인의 성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터다. 암묵적으로 강도를 좋은 것이라 가르치는 것과 같다.”라는 기록도 있다.
또 가후는 말년에 문화훈장을 받고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는데, 그 이후에 보란 듯이 반라의 무희들 무리 속에 웃고 있는 사진들을 공개하기도 했다. “약자에게 이익이 되는 시대가 언제 있기는 했는가.”
??? 나가이 가후를 사랑한 작가
▶ 다니자키 준이치로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나가이 가후의 『아메리카 이야기あめりか物語』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그는 가후 문학에서 자신의 예술상의 혈족을 느꼈고, 흔들리던 그의 문학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고 고백한다. 후에 나가이 가후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등장한다.
“나는 장래에 문단에 나갈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가후에게 인정받고 싶다 생각했고 언제나 그런 날이 오리라고 꿈같은 공상에 빠지기도 했다.”
▶ 미시마 유키오
노벨상 후보에도 오른 미시마 유키오는 할머니 나쓰코의 친가인 나가이 집안과 서로 동족이다. 나쓰코의 9대 조인 나가이 히사마사의 이복형 나가이 마사나오가 가후의 12대 조가 된다. 아버지 아즈사의 풍모는 가후와 흡사한 부분이 있어서, 미시마는 아버지를 은근히 ‘가후 선생’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 이노우에 히사시
일본을 대표하는 극작가인 이노우에 히사시는 가후를 동경하여 연극 무대와 연을 맺게 됐는데, 문학청년이던 시절 아사쿠사에서 가후를 만난 일을 평생 자랑거리로 삼았다. 특히 가후의 일기 『단장정일승』은 일본어가 존재하는 한 반드시 읽어야 할 문장이라고 예찬했다.
▶ 에드워드 G. 사이덴스티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영어로 번역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Kafu the Scribbler』(1965)를 통해 가후의 작품들이 서양에도 많이 알려졌다며, 도쿄 역사를 다룬 『도쿄이야기』를 가후에게 헌정한다. “가후를 일반적으로 호색적인 작가라고 생각들 하지만, 가후 작품의 본질은 향수와 만가에 있다. 홍등가는 에도 문화의 중심이었다. 에도의 잔재가 아직 살아 있다면, 보수적인 화류계뿐이었다. 그러니 가후가 화류계를 즐겨 묘사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 최명희
최명희 작가의 『혼불』에도 인용되지 않았던가.
“오유끼… 좋은 이름인데…? 나가이 가후의 여인이로구나.”
오유끼는 그 허무한 냉소주의자 나가이 가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였다. 일찍이 히로쓰 류로의 문하에 들어가 습작을 한 그는 일본 고래의 춤과 피리, 만담 등을 공부하다가, 1903년에는 미국으로, 또 4년 후에는 프랑스로 마음껏 떠돌던 사람. - 『혼불』 중에서
▣ 작가 소개
저 : 나가이 가후
永井荷風
1879~1959.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 한시 시인이자 관료인 아버지 나가이 규이치로와 한문학자 와시쓰 기도의 차녀 쓰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소키치, 호는 가후. 다른 필명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딴 단장정주인?腸亭主人, 긴푸산진金阜山人 등이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1903년에 미국에서 일하다가, 1907년에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건너가 자연주의 문학에 매료된다. 귀국 후 『아메리카 이야기あめりか物語』 『프랑스 이야기ふらんす物語』 등 여러 작품을 출간했으나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이어 발매금지 당했다. 1909년에 나쓰메 소세키의 요청으로 <도쿄아사히신문>에 「냉소冷笑」를 연재했으며, 1910년에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대 문학과 교수가 됐다. 그러나 천황을 암살하려는 대역 사건을 보며 문학가로서 무력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뒤 주로 화류계를 배경으로 사라져가는 에도의 정서를 묘사하는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또 「히요리게다日和下?」를 비롯해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망가져가는 도시 도쿄를 안타까워하며 골목과 공터, 언덕과 강 등을 느릿느릿 산책하며 손수 지도를 만들고 글을 남겨... 1879~1959.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 한시 시인이자 관료인 아버지 나가이 규이치로와 한문학자 와시쓰 기도의 차녀 쓰네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소키치, 호는 가후. 다른 필명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딴 단장정주인?腸亭主人, 긴푸산진金阜山人 등이 있다.
아버지의 권유로 1903년에 미국에서 일하다가, 1907년에 꿈에 그리던 프랑스로 건너가 자연주의 문학에 매료된다. 귀국 후 『아메리카 이야기あめりか物語』 『프랑스 이야기ふらんす物語』 등 여러 작품을 출간했으나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연이어 발매금지 당했다. 1909년에 나쓰메 소세키의 요청으로 <도쿄아사히신문>에 「냉소冷笑」를 연재했으며, 1910년에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게이오대 문학과 교수가 됐다. 그러나 천황을 암살하려는 대역 사건을 보며 문학가로서 무력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뒤 주로 화류계를 배경으로 사라져가는 에도의 정서를 묘사하는 작품 창작에 전념했다. 또 「히요리게다日和下?」를 비롯해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망가져가는 도시 도쿄를 안타까워하며 골목과 공터, 언덕과 강 등을 느릿느릿 산책하며 손수 지도를 만들고 글을 남겨 ‘산책 예찬론자’로 불린다. 1952년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954년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대표 저서로는 『지옥의 꽃地獄の花』(1902) 『꿈의 여인夢の女』(1903) 『스미다 강すみだ川』(1911) 『에도예술론江?藝術論』(1920) 『장마 전후つゆのあとさき』(1931) 『강 동쪽의 기담?東綺譚』(1937) 『단장정일승?腸亭日?』(전7권, 1958) 등이 있다.
역 : 정수윤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방송 작가와 기업체 홍보실 사보 기자로 일하다가, 일본 대중 소설에 관심을 갖고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와세다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에 입학해 ‘에도가와 람포와 그로테스크 문학’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 야나카 마을의 옥탑방에서 지내던 당시, 함께 살던 모기, 거미, 바퀴벌레와 이름 모를 곤충들에게 영감을 얻어 《모기소녀》를 집필했다.
▣ 주요 목차
히요리게다
서문 9
히요리게다 11
사당 24
나무 27
지도 36
절 42
물 그리고 나룻배 53
골목 69
공터 75
벼랑 93
언덕 106
석양 그리고 후지 산 풍경 113
그 밖의 산책 수필
우에노 122
백화원 139
후카가와 산보 146
부록
『히요리게다』 해설 162
도쿄의 변천 : 에도부터 헤이세이까지 170
주요 산책 지도 178
연보 : 나가이 가후 생애 및 산책로 192
역자 후기 : 도시 서울 애상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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