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조선의 건국자들은 나라의 앞길을 어떻게 공간에 담아내었는가
『경복궁, 시대를 세우다』는 한양 천도에 앞서, 1389년 말부터 1392년 여름까지, 공양왕이 재위(1389~1392)했던 2년 반이란 짧은 기간에 숨 가쁘게 벌어졌던 정치 투쟁에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우리는 1388년 위화도 회군부터 사전개혁을 거쳐 공양왕이 물러나기까지 새 왕조의 개창자들이 예정된 길을 차근차근 밟아간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당대로 들어가서 보면 예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매우 격동적이고 다면적인 변화의 과정이었다.
당시 폭발적인 이슈는 ‘연복사 중수’와 ‘한양 순주’였다. 이 사건들은 공양왕이 공민왕의 정치를 모방하고, 멀리는 태조 왕건의 유훈(훈요십조) 실행이란 전통적 권위를 빌어 왕권의 회복을 위한 마지막 노림수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저자는 이 시기 정치 공방의 본질은 권력의 정당성에 있었다고 본다. 좋은 목적만큼이나 바른 수단을 중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물리적 힘의 억지스러운 강압보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함으로써 지지의 논리와 세력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건국자들은 전통적 권위를 해체하고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념이 더욱 우월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했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권력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새로운 프레임을 짤 수 있었다. 이 책은 한양 천도와 궁궐을 통해 새 권력의 주체들이 어떻게 전통적 권위를 해체하고 새 정치권력의 상을 그려내었는지를 섬세하게 살핀다. 그리고 그것이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의 레이어를 탐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 시대의 단면을 평평하게 늘어놓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권력이 성립하던 그 시대의 기획을 이해함으로써 변화의 방향과 이를 추동한 힘을 읽어 내고, 그것이 현실에 부닥치며 어떻게 조율되는지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룰 궁궐과 수도는 늘 권력의 핵심 장소였다는 점에서, 그 권력의 성격과 기획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다. 이렇듯 가시적인 공간을 통해 비가시적인 권력을 드러내고, 기획과 현실의 변증법을 통해 이 시대를 종합적으로 보려는 것, 이것이 이 책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부분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임금의 부지런함은 어떠해야 하는가?
새 왕조의 새 수도 정하기의 여정은 전통적 권위의 영향과 새로운 권력의 장점이 교차하는 매우 극적인 선택의 연속이었다. 한양 천도는 이성계가 했던 그 어떤 일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깊은 족적을 남긴 것으로 저자는 꼽는다. 계룡산, 한양, 무악, 적성 광실원, 장단 백악, 도라산 등의 후보지 중에서 왜 하필 한양이었을까? ‘중앙 입지와 조운 소통’의 입지론이었다. 당시 3개의 선택지, 즉 『도선비기』같은 전통적인 도참, 형세를 설명하는 이론지리서, 그리고 국토 중앙 입지와 조운 소통 같은 입지론 중에서 마지막 기준에 힘을 실린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장지연 교수는 정도전, 조준, 하륜 같은 조선 건국자들에게 도참론은 아예 지식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 입지와 조운 소통이라는 입지조건을 따졌던 것은 당대의 시대성을 반영한 것으로 그만큼 “최대한 전국에 대한 국가의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염두에 두고 수도를 생각했다”고 본다.
이제 책은 새 수도 서울이 건설되고 제 모습을 갖춰 가던 시기, 경복궁이라는 법궁이 어떠한 기획 아래 만들어졌는지로 이어진다. 1394년 12월부터 시작된 경복궁 공사는 약 10개월간을 거쳐 이듬해인 1395년(태조 4) 9월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 경복궁의 전각 규모는 내전 173칸, 외전 212칸, 궐내각사 390여 칸, 총 775칸으로 고종대 중건된 경복궁의 5분의 1의 규모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강녕전(연침)-사정전(보평청, 이상 내전)-근정전(정전)-정문’ 순으로, 경복궁의 가장 안쪽의 전각에서부터 바깥으로 나오며 그 이름에 담긴 뜻을 설명한다. 이는 저자가 자의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이 정한 순서를 따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순서는 바로 ‘군주의 정심성의-격물치지와 정사(천하의 이치를 얻는 법)-구체적인 정사의 내용(천하의 일을 다스리는 법)-요약’에 해당하는 구성이었다. 수신에서 평천하까지, 내면의 수양에서 외면의 정치까지가 성리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이념적으로 고려와 구별되는 큰 기획이었다. 정도전이 담은 뜻은 이 시대 새로운 정치와 사회 개혁을 희망했던 이들이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바람은 이제 새 군주를 통해 찬찬히 실현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간의 전환, 그리고 구질서의 해체
조선 건국 여정에서 그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암살이라는 극히 폭력적인 행위로 제거하며 원죄를 남겼던 태종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1398)이란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재위에 오른 정종은 개경의 복귀하였다. 이성계의 충격과는 달리 개경 천도는 대다수 관료와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500년 도읍지 개경의 관성은 그만큼 강력하였다. 다시 한양으로 갈 수 있을까? 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이방원의 한양 재천도는 그들의 과단성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두 왕이 거침없고 단호한 성격이란 점에서 닮았지만 리더십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고 평한다. 이성계가 왕건을 의식하면서 절차적 정당성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새 권력을 얻었다면, 이방원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어쨌든 전격적으로 한양 재천도가 결정된 후 이 둘의 관계는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태종은 이후에 한양의 거의 모든 곳에 손을 댔다. 창덕궁을 수리하고, 그 앞에 관아들이 들어올 조방을 만들었으며, 개천을 준천하고, 종로 거리에는 시전 행랑을 건설하였다. 문묘를 수리하고, 도성을 전면적으로 보수하였다. 한양은 사실상 태종의 손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정비된 것이었다.
비록 굴절이 있었으나 수도의 이전은 고려의 구질서를 깨는 중요한 계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비보풍수(풍수의 단점을 보완) 체계와 왕의 순주였다. 한양 천도는 개경을 비보하는 체계가 필요 없기에 불교 교단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한편 국왕의 순주 개념 역시 성립하기 힘들었다. 고려의 국왕이 별경이나 별궁에 순주한 것은 지맥의 근본이 서경(평양)에 있었기에 때때로 개경이 쉬어 줄 필요가 있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국왕의 순주나 비보사사의 체계처럼 개경이라는 공간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고려의 구질서는 한양 천도를 계기로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태조와 태종이 이 정도의 효과까지 기대하였던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공간의 전환은 예상외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을 어디에 배치할지가 바로 정치의 방식
경복궁의 안과 밖에 여러 관서 공간들이 갖추어져 갈 때, 새 체제에서 지향한 권력에 대한 생각은 확연히 드러났고 또 그대로 적용되었다. 과연 관서의 위치는 무엇을 의미할까? 고려의 경우 주요 관서들이 모두 본궐 안에 모여 있었던 데 반해 조선의 건국자들은 궁궐 안에 예문관, 춘추관, 집현전 등 최소한의 기관만 둔 반면, 의정부와 삼군부, 육조 등의 주요 관서들은 궁성 남문 밖에 위치하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국정 운영의 속도와 편리성보다는 투명성을 중시했다고 평가한다. 도평의사사(의정부)와 의흥삼군부가 궁궐과 가장 가까운 동편과 서편에 자리한 것은 문무의 겸비를 중시한 조선건국자들의 시대정신이었다고 한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조선이 망한 이유를 지난 100년 동안 열심히 찾아왔으니, 이제는 조선의 건국자들이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이란 전란의 세기를 어떻게 헤쳐나왔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짊어졌던 짐들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자고 제안한다.
육조거리의 관서배치 중에 저자가 갸웃갸웃했던 부분이 바로 예빈시의 위치였다고 한다. 예빈시는 일반적으로 사신 접대를 맡은 기관으로 예조에 소속되었다. 기관의 급도 떨어지는 데다 중국 사신이 묵었던 태평관 부근에 두지 않고 왜 핵심 요지였던 도평의사사 옆에 두었던 것일까? 바로 의정부 재상들에 대한 대접이 그 이유였다. 이는 재상권을 강화하고 투명하게 정치를 운영하고 싶다는 조선의 지향이 담긴 것이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앞둔 지금, 권력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지
조선 건국자들의 고민에서 배운다
두말할 것 없이 조선의 권력공간은 조선의 것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 시도는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력과 공간의 관계에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한 보편성이 있기에, 그들이 그 권력공간에 담은 생각에도 보편적인 울림이 있다. 구실서의 권위는 어느 선까지 청산되어야 하는가? 새로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부패하지 않는 권력을 만들기 위해 투명성과 공정성은 어떻게 담보해야 하는가? 이렇게 정립한 권력을, 어떻게 세대가 바꿔어도 그 건전성를 유지하며 계승시킬 수 있을까?
한 시대 새로운 나라를 만든 정치인들이 던진 이러한 질문들과 답이, 비숫한 고민을 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을 좀 더 두터우면서도 폭넓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 책에 담았다. 지금의 경복궁은 초기의 기획과 달라졌지만 당시의 고민들을 이해하고 다시 본다면 본명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지은이의 말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조선 초기의 기획 역시 그 수명을 다한 때가 도래하였다. 천하가 급변하면서 사람들은 이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으나, 국가는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조선의 말기, 초기 기획으로 돌아가자고 강력히 주장하며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 그 고민이 당시의 시대정신과 현실의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개혁의 방향을 담고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평가할 때 그 중건은 470년 전의 공양왕의 연복사 중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미란다는 권위에 균열을 가져올 뿐이다. 그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작가 소개
저 : 장지연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대전대 역사문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궁궐과 수도 계획 전반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있으며, 언어를 통해 공간의 위상을 살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공간의 역사성을 짚어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탐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고려?조선 국도풍수론과 정치이념』(2015), 『민음 한국사: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공저, 2014), 『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5』(2010), 『고려 황도 개경』(공저, 2002) 등이 있다.
목 차
프롤로그: 보이는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과 시대를 읽어내기
1. 고려의 마지막 몸부림
사라졌다 찾은 연복사탑 중창비
공양왕과 정몽주, 반전을 꾀하다
태조유훈, 고려의 미란다와 크레덴다
· 훈요십조
한양 순주와 연복사 중수
구언교서, 무너지는 선왕성헌
왕건의 재해석
2. 새 왕조 새 수도 정하기의 여정
한양은 정말 무학대사가 고른 땅일까
설화에 담긴 시대성
왕건이 되고 싶었던 이성계의 꿈
유교 군주 이성계의 독실한 불교 신앙
계룡산에라도 천도하겠다
천도지 답사, 마침내 한양으로
전통의 영향과 퇴조, 그리고 수도의 조건
3. 정도전이 경복궁에 담은 뜻
한양의 밑그림: 종묘와 사직, 궁궐, 시장과 도로
경복궁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임금의 큰 복은 무엇인가: 경복
침전은 편안한 공간인가: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투명한 정치에 대한 갈망: 사정전
‘부지런함’의 근거: 훈요십조와 근정전의 차이
임금의 부지런함은 어떠해야 하는가
政과 正, 德과 得: 정문
4. 굴절, 그러나 연속
왕자의 난, 개경으로의 복귀
다시 한양으로 갈 수 있을까
500년 수도, 개경의 관성
공간의 전환, 그리고 구질서의 해체
아버지의 죽음과 태종의 새로운 공사
· 태종에 의해 재탄생한 한양
버릴 수 없는 법궁
새로운 위상을 더하다: 경회루
5. 궁궐의 안팎에 위치한 관서
관서의 위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없던 건물은 왜 만들었나: 도평의사사
문무는 양팔과도 같다: 도평의사사와 의흥삼군부, 융문루와 융무루
문무의 겸비는 왜 중시되었나
학문은 늘 임금의 곁에: 집현전
지식은 널리 보급되어야 한다: 주자소
공과 사의 경계, 편전에 사관이 들어가기까지
권력을 어떻게 승계할 것인가: 동궁
에필로그 : 기획과 현실 사이에서
참고문헌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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