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긴 지켜봄이 아주 담담한 이해와 사랑에 닿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글을 읽는 지금, 당신이 살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작은 기적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 박서련 (소설가)
이 책이 더 특별했던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마음마저 돌봐주었다는 점이다. 가까운 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유대. 이 책이 고맙다.
- 이기호 (소설가)
"피 여사,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이름이 뭐라고요?"
"두바이?"
염세주의 손자와 비관주의 할머니의 동거 일기
그 기적 같은 기쁨과 유대의 기록
‘백 살’ 할머니, 일흔 살 어머니, 마흔 살 손자, 모두 더하면 210살. 작가로 살던 손자는 코로나 시대를 맞아 느닷없이 ‘백 살’ 할머니 피영숙의 간병인이 된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혼자 방에서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보내던 그는, 할머니가 살아온 백 년의 삶, 노년의 고통과 기쁨을 이야기로 기록한다.
이 책은 세상 바깥에서 살고 있다고 믿던 작가가 자신보다 작고 약한 할머니를 돌보면서 발견한 기쁨과 유대의 이야기다. 이인은 “이렇게 살 바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오래” 하며 살았다. 그런 그가 “텔레비전보다는 텔레비전을 보는 피 여사를 시청”하며 할머니 피 여사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피 여사는 야생동물 다큐멘터리와 격투기 경기를 좋아했다. 앵무새를 보면 눈을 떼지 못했고, 한일전 축구 경기를 보고 또 보았다. 이인은 피 여사와 삼시세끼를 같이 먹고, 거동을 돕고, 밤마다 자세를 고쳐주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이해하려는 사랑의 기록”이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우리는 모두 그들처럼 된다. 노인이 되면 젊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들이닥치는데, 이 고통은 전 세계 공통이다. 외로움, 생계 곤란, 건강 악화, 배우자와의 사별, 자식 문제, 시대 변화 부적응 등등. 피 여사는 이 모든 걸 겪으면서 노후를 맞았다. (15쪽)
긴 지켜봄이 담담한 이해에 닿는 순간
사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
피 여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이인은 피 여사를 보살피며 한때 자신을 기른 한 여성의 삶을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생전 처음으로,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글로 적는다. 작가는 한 여성이 살아온 백 년의 삶을 듣고 기록한다.
피 여사의 삶은, 가난한 여성이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은 기록이다. 피 여사는 1925년에 태어나 겨우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십 대의 나이에 공장에서 일했다. 1944년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자 스무 살에 낯모르는 남자와 결혼했다. 남편은 가족을 돌보지 않는 마약쟁이였고, 한 집에 첩을 두었고, 한국전쟁 때 학살당했다. 피 여사는 두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지만,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피 여사는 세 아이를 더 낳고 비참한 삶을 견뎠다.
어느 날, 피 여사가 울부짖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여명의 새벽녘에 아흔을 넘긴 노파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구슬프게 흐느꼈다. 피 여사는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이면서 오열하고 있었다.
피 여사의 주변으로 슬픔의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글픔과 서러움으로 뒤엉킨 어둠이었다. 어둠을 걷어내려 손을 뻗다가 주춤했다.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설프게 손을 내미는 건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 같았다. 피 여사가 충분히 울도록 그저 바라보았다. (49쪽)
피 여사도 한때는 직접 거동하며 자식과 손자를 돌보았다. 하지만 피 여사는 삶을 혼자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눈이 침침해졌고,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며, 잇몸에서 피가 나고, 이가 시렸으며, 밥 먹을 때는 입이 말라 음식이 영 까끌까끌했지만 잘 때는 침을 흘렸다. 골다공증이 생겼고, 근력이 약해졌고, 소화가 안 됐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았고, 변비에 걸렸고, 요실금에 시달렸고, 오십견이 생겼다. 허리를 삐끗했고, 무릎에 염증이 찼고, 삭신이 쑤셨고, 팔이 저렸고, 목이 욱신거렸고, 호흡이 가빠왔고, 검버섯이 생겼고, 심장이 안 좋아졌다.
일흔 살 딸과 마흔 살 손자는 피 여사의 하루에 삶을 맞추기 시작한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는 피 여사를 위해 성인용 기저귀를 구입하고 외출은 한 번에 한 사람만 했다. 어느 날부터 손자는 피 여사가 낮잠을 자지 않고 밤에 푹 잘 수 있도록 몰래 두유에 커피를 타 넣고 낮에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렇게 피 여사와 함께 사는 법을 익혀 나갔다.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병 이름이 뭐라고 했죠?"
"보루네오."
뜬금없이 피 여사는 보루네오라고 답했다. 과거에 각인된 가구 브랜드 보루네오가 코로나와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린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으면 피 여사는 스리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염병 이름이 뭐라고요? 맞춰봐요. 코로 시작해요."
"코, 코, 코브라."
피 여사의 답에 웃지 않고는 못 배겼다. (289쪽)
손자는 할머니를 돌보며 비로소 작가가 된다. 삶을 이야기로 적는 사람이 된 것이다. 피영숙의 삶을 이해하며 작가는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을 한 가지 배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는, 단순하지만 놓치기 쉬운 사실.
피 여사가 밥 잘 먹고 침대에 누웠을 때 행복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뜻밖에 피 여사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 여사와 내가 옆에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한 말이겠으나, 피 여사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답변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 (295쪽)
(* 제목에 쓰인 백수는 놀고먹는 사람을 뜻하는 백수白手가 아니라 아흔아홉 살을 뜻하는 백수白壽에서 가져왔다.)
작가 소개
이인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엔 자타공인 ‘오지라퍼’에 ‘마당발’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소식과 비밀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 호기심이 많아 묻고 캐면서, 또 그들과 어울리면서 인간 복덕방을 자처하며 보냈다. 어쩌면 오지랖은 고독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시도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뜻한 바가 있어서 고독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모임에도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고, 사람들과 연락하고 만나는 일을 등한시했다. 그렇게 십 년을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방구석에서 홀로 공부했다. 십 년이 지나고 세상으로 다시 나오려는 순간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여전히 방구석에 있다. 이른바 고독력(孤獨力)이 있다면 아마도 ‘만렙’을 찍었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문 걸어 잠그고 공부하던 옛 선조들은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리를 내다봤다고 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나 골방에서 보낸 세월 속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과 인간은 때로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진실이다. 이 빤한 진실을 깨닫느라 시간을 보낸 까닭에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직장도 없고 애인도 없고 모발도 없지만, 고독만은 넘치도록 풍요롭다. 인생과 세상을 두루두루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는 『남자를 밝힌다』 『남자, 여자를 읽다』 『성에 대한 얕지 않은 지식』『고독을 건너는 방법』 등이 있다.
목 차
추천의 글
들어가며
1부 할머니와 손자
우리는 모두 늙는다 | 주저앉은 피 여사 | 보행기를 끌게 되다 | 그나이에 틀니가 가당키나 하냐 | 거울 앞에서 빗질하는 노인 | 혹시나 무슨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 오랜만의 외출 | 노인들은 금세 친해진다 | 인절미와 시장표 김 | 용건이 있어야 전화를 거니? | 나 안 보고 싶었어? | 전화교환원과의 갈등 | 이웃집 노인의 자식 자랑 | 텔레비전이라는 은인 | 드라마에 몰입하다 | 사자와 하이에나 | 개와 고양이 | 보고 있으면 몸이 후끈후끈해져 | 비공식 국가 대표 응원단장 | 바보가 되는 것보다 무서운 것 | 은으로 만든 빗 | 층간 소음과 효녀 효자들 | 모두 각자의 노후 | 치즈에 눈을 뜨다 | 타인과 함께 먹는 법 | 암묵의 통행금지 | 비타민이 필요해 | 과일 사계절 | 골드키위와 그린키위 그리고 망고 | 최애 생선 | 연어라는 행복 | 배고프지 않으려는 인간 | 가깝지만 가장 먼 | 모녀, 해묵은 애증의 관계 | 가족끼리 잘 지내기란 | 장편소설 같은 파란만장
2부 피 여사
할머니 덕분에 살았다 | 학교에 가고 싶어서 | 일자무식에서 벗어나다 | 강제징용된 남동생 | 남자가 덩치가 있고 키가 커야지 | 예쁘고 아름다운 새색시 | 행복과 고통의 총량 | 연이은 조카들의 죽음 | 콩가루 시댁을 향한 원망 | 모난 성격은 모진 세월의 반영 | 똑똑지 못한 빨갱이 | 미우나 고우나 하나였던 | 이북 남자의 편지 공세 | 니가 도망가면 일본을 가겠냐 중국을 가겠냐 | 온전치 못한 환대 |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없이 | 밑도 끝도 없는 폭력 | 승냥이를 피해 호랑이 굴로 | 눈 좀 밝게 해주세요 |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 젊은 사람들보다 더 빨리 뼈가 붙었다 | 사돈어른과의 어색한 오후 | 사라진 손자 | 헐벗은 가슴으로 상처를 끌어안고 | 미래를 향해 쏜 화살 |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불화가 필수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 피 여사의 자식들 | 셋째 아들과 막내아들 | 내 처지가 지옥 같더라도
3부 가족
이유를 따지자면 핏줄 | 가족이라는 울타리 | 시커멓게 캄캄한 밤 |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려면 | 나이가 들수록 비보는 늘어난다 | 인간은 받은 걸 결코 잊지 않는다 | 단출한 장례식 | 미움으로 삶을 소진하지 않기를 | 엄마가 처음이라 | 말없이 눕다 | 어머니, 나 좀 데려가요 | 들리지 않는 신음과 절규 | 미장원에 가자 |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 전염되는 우울 | 마음에 드리운 장마전선 |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엉엉 | 오랜 병에 효자 없다 | 도둑맞은 하루 | 수렁으로 빠져들다 | 뼈만 남은 엉덩이 | 현실도피 | 백 세까지 살기를 바랐지만 | 심야의 불침번 | 악마의 히죽임 |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요하게 | 내가 언제 자는 거 봤냐 | 아기가 된 할머니 | 고통을 마주하는 힘 | 스스로 매듭짓는 일 | 내가 없는 날 | 지금 행복해요? | 내가 죽길 고사 지내는 거냐 | 코알라와 두바이 |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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