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하나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유연한 상상력과 담백하게 전하는 위로
한국문학이 주목한 신예 전예진 첫 장편소설 출간!
201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할 당시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위트와 시니컬하게 서술한다는 평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신예 전예진의 첫 장편소설이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신작 장편소설《매점 지하 대피자들》은 번아웃과 무기력에 빠진 한 청년이 자발적으로 은둔하고자 찾아간 깊은 숲속 고라니 호텔, 그 안의 비밀 굴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기거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명한다. 소설은 모든 책임과 관계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시작된 자발적 은둔이, 굴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는지에 주목한다. 소설은 세상으로부터의 철저한 회피를 꿈꾸며 굴속으로 망명한 청년의 시선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재건되는 또 다른 사회와 질서를 탐구한다. 야전삽으로 직접 자기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굴속의 규칙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은둔자들만의 느슨한 연대는 현대인이 갈망하는 관계에 대한 의미와 결국 인간은 타인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라는 한계를 동시에 제시한다.
야전삽으로 직접 자기 방을 파야 하는 은둔자들
선우는 3년 차 직장생활의 퇴직금과 하루 한 끼 대용식 ‘해결사’ 바(Bar)에 의지해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자 한다. 가만히 누워서 반년쯤 지내고만 싶다. 누구도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 그는 이제 무엇도 견디고 싶지 않다. 그런 와중에 집주인이 화장실 공사를 해야 하니 한 달 동안 집을 비워달라고 연락해왔다. 그는 며칠 전 우연히 마트에서 마주친, 어떤 한 남자의 말을 떠올린다.
“우리 가게가, 드물게 숙박도 받거든요.” 주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숙박이요?”
주호가 선우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고 손짓하자 선우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잘 들어요. 혹시 뭐가 잘 안 되면,” 주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적강산 자연휴양림 고라니 매점으로 오면 돼요.”
그가 도착한 휴양림 매점 한쪽 벽면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고, 그 지하에는 거대한 ‘굴 호텔’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곳의 투숙객들에게만 주는 기묘한 어메니티가 있다. 헤드랜터과 야전삽. 입실과 동시에 주어지는 야전삽으로 자신이 누울 공간을 직접 파야 한다는 것. 그는 그곳에서 그만 나가야되겠다고 생각했으나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온 거 같았다. 굴을 어떤 모양으로 파야 하는지, 숨구멍의 위치와 화장실을 보는 법 등등.
한 달치만 먼저 내려고 했는데 봉투 속 현금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 준비해온 6개월 치 보증금을 모두 내놓았다.
“그래도요.” 주호가 느릿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여기서는 마음껏 할 수 있을 거예요.”
“예? 뭘요?” 선우가 물었다.
“뭐든, 선우 씨 하고 싶은 거요.”
모든 게 신기했다. 이마에 붙은 불빛에 의지해 굴속을 헤매다녔고 자신의 방을 찾아, 기거할 굴속 공간을 찾아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기거한 흔적들, 냄새들, 처음엔 누워만 지내고 싶어 했던 주인공에게 굴을 파는 노동은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는 삽질, 그리고 먼저 도착한 은둔자들이 건네는 묵묵한 도움은 고립을 꿈꿨던 주인공에게 뜻밖의 감각을 선사한다. 생존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자야 하고 먹어야 하는 감각. 빛에 대한 감각. 소리에 대한 감각. 그동안 도시에서의 삶에 묻혀 깨어나지 않았던 인간의 감각을 만나게 된 것. 공간을 획득하기 위한 삽질로 인해 몸이 힘들지만, 그만큼 정신은 한 가지에 집중된다.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 문득, 자신이 자발적으로 이곳으로 향했던 이유에 대해 떠올린다. 마음 편하게 자고 싶다. 지금 내 손으로 파내었던 굴속에 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음 편하게 잘 수 있겠다 라고.
“여기가 그렇게 힘들기만 하진 않아. 익숙해지면 여기만 한 데도 없다니까. 다른 사람 신경 안 써도 되고 이렇게 산다고 손가락질받을 일도 없고 그냥 내 몸만 좀 고단하면 되거든. 그 래서 오래 머무는 사람도 많아. 차라리 몸이 괴로운 게 낫다는 거지.”
굴속에서 다시 이어지는 사람과 사람들
조금은 서먹했던 옆 굴 사람들이 라운지인 지하로 모여들고, 모여든 라운지에서 사람들은 희미한 관계를 만든다. 각각의 사연들, 행복해지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일들. 공통점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쳐 여기까지 왔다,라는 것. 크고 작은 것들에게서 회피해 여기로 숨어버렸다는 것. 관계는 공통된 자신들의 처지가 타인과 같음을 통해 긴밀해진다. 그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 잘 수습해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도망쳐왔던 현실에 다시 안착하기.
“여긴 멀쩡한 사람이 없네요. 인생 망한 사람만 모인 곳이네.”
“ 왜 그렇게 얘기해요. 나만 망했지, 다 잘 지내다 나가기로 했잖아요.” 혜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 잘 지내다 나가요? 알코올중독에, 살인에, 부모 돈으로 불법 영업하고 코인하고, 그게 되겠어요?”
선우가 계단에 뒤엉킨 빛과 그 위에 선 혜원을 돌아봤다.
“ 잘될 거라는 말…… 난 믿은 적 없어요. 여기까지 와서 숨어 사는 인생인데, 뻔하잖아요.”
작가는 현실로부터 회피하고 싶은 심리에서 촉발된 자발적 은둔이, 어떻게 그곳만의 새로운 사회적 질서로 재편되는지를 추적한다. 그냥 누구의 방해 없이 잠을 자고 싶어 숨어든 굴에서조차 옆 굴 사람의 삽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먼저 온 은둔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 자리를 마련하게 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인간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다. 더불어 고립을 꿈꿨던 주인공은 역설적으로 굴속 사회의 규칙을 학습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사연을 말하고 우리가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 사실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어긋난 사회적 관계였음을 깨닫는다.
작가 소개
전예진
201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어느 날 거위가》, 앤솔러지 《여름기담: 순한맛》 《영원히 알거나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된다》 등이 있다.
목 차
1부 집 007
2부 굴 037
3부 산 237
작가의 말 258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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