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누군가와 가까워질 때는 그의 모든 것이 온다
거짓 없이, 감춤 없이, 후회 없이
담대한 용기로 빛나는 순백의 글쓰기
『밝은 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첫 산문집
소설가 최은영이 데뷔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산문집을 출간한다. 2024년 가을부터 2025년까지 써내려간 6편의 새로운 원고에 기존에 발표한 4편의 원고를 고치고 더해 완성한 책으로, 한 편 한 편이 단편소설에 가까운 긴 호흡으로 이어지며 최은영 특유의 “정서적 중량감”(문학평론가 서영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로 커다란 주목을 받은 이후 각별한 관심과 기대 속에서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장편소설 『밝은 밤』 등을 선보이며 견결한 소설세계를 만들어온 작가는 자신의 첫 산문집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백지 앞에서』는 작가가 처음 털어놓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다시 혼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착취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시절에 대한 기록부터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병원을 자주 오가야 했던 지난겨울의 이야기, 어린 시절에 형성되어 짧지 않은 시간 지속되었던 외모에 대한 강박, 동물권과 세월호 참사 등의 사회문제를 아우르며 우리가 서로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목소리까지, 최은영이라는 한 명의 작가이자 개인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지 하나씩 꺼내어 보인다. 특히 표제작 「백지 앞에서」는 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여겨온 작가의 뜻밖의 고백을 통해 삶을 추동하고 치유하는 글쓰기의 의미를 헤아리게 한다.
최은영의 글쓰기는 ‘순백’을 닮았다. 이때의 순백이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가리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깨끗하고 맑은 내용을 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편에 놓인, 얼룩과 그림자가 새겨진 상태를 숨김없이 전부 보여주고자 하는 결기에 가까운 태도를 뜻한다. 우리 각자의 내밀한 비밀과 상처는 남몰래 숨겨둔 일기장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인터넷 검색창에, 조용히 내뱉는 혼잣말 속에 흘려보내는 게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최은영의 진실은 바로 여기 이 산문집에 온전히 담겨 있다.
여린 새잎을 내는 봄부터 한기로 가득찬 겨울까지
무한히 펼쳐진 시간 앞에 선 유한한 우리에게
『백지 앞에서』는 삶에 드리운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지 오래도록 고민한 사람의 기록이다. 누군가에게는 종이 한 장의 무게를 지닌 사소한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온몸을 짓누르는 무거움으로 다가가듯이 우리 각자가 삶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상대적이고, 그렇기에 절대적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가 “만인에게 (…) 패를 보이는”(17쪽) 어리석은 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약점과 취약성을 감추는 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여겨지니까. 하지만 최은영은 그것을 모두 노출하는 쪽을 택한다. 이 삶은 내가 무언가를 더 얻거나 잃는 승부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약점과 취약성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진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최은영이 첫번째로 털어놓는 것은 ‘진짜 감정’에 대해서이다. 최은영은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보일까봐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거나,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타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던 시간에 대해 말하며 그 근간에는 스스로의 가치를 부정하는 깊은 자기혐오가 있었음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 같은 말이 칭찬으로 쓰이는”(63쪽) 상황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 사랑받는 사람”(64쪽)으로 보이고 싶었다는 작가의 고백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의 키를 다른 사람에게 내맡긴 적이 있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두번째는 ‘유약한 상황’에 대한 것이다. 작가는 오래도록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오다 몇 년 전부터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 “자발적으로 독거를 선택했지만, 애초부터 혼자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고, “내가 꿈꿨던 미래에는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여 양육하는 모습이 언제나 존재했다”(138~139쪽)는 말처럼 작가에게 ‘혼자 사는 삶’은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정확히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날씨처럼 언제든 허를 찌르며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펼쳐지는 삶, 최은영은 그런 삶 앞에 여러 차례 서 있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최은영이 현재의 삶을 오래전에 바랐던 삶의 기준에 맞추어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은영은 과거와 현재의 낙차를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써 삶의 유동성을, 불규칙성을, 연약함을 끌어안는다. 그것은 매 순간 달라지는 삶을 새롭게 배우며 살아내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인식이 부서지는 순간’에 대한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또한 변화한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또는 이전과는 다른 낯선 세계에 진입하면서. 최은영은 대학생 때 ‘여성주의 교지 편집부’에 가입하기로 결심한 순간이 인생의 큰 방향을 좌우하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마치 “평생을 근시로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어느 날 안경을 쓰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본 사람처럼”(25쪽) 그전과는 다른 빛깔과 형태를 지닌 세상이 펼쳐졌다고.
최은영은 동물에 대한 생각도 변화를 거쳤다고 말한다. “고작 한 마리의 고양이를 사랑했을 뿐인데 세상의 모든 동물에 대한 시각이 달라”(262쪽)졌다고 말이다. 두툼한 교지 한 권, 길에서 마주친 노란색 치즈 고양이 한 마리, 억눌러왔던 내 욕망을 일깨우는 책 속 어떤 문장 하나… 『백지 앞에서』는 인생은 크고 거대하지만, 그것의 구조를 바꿔놓는 것은 자그마한 무엇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은 예상치 못한 속성 탓에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기고, 동일한 바로 그 속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뜻밖의 무언가를 건넨다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당장 판단하지 않으려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로서의 내가
인간으로서의 나를 피해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삶의 전부를 살아내는 사람, 최은영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백지 앞에서』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글쓰기에 삶의 거의 전부를 건 작가의 모습이 책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은영은 데뷔하기까지 여러 공모전에서 고배를 마셨고, 데뷔하고 예상치 못한 성공을 가져다준 『쇼코의 미소』 이후에도 일종의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리며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여왔다. 첫 책이 나오고 몇 년 뒤에는 “소설은 물론이고 메일이나 일기를 쓰는 것조차 어려운 시기”(39쪽)를 겪기도 했다. 최은영은 그런 시간을 다른 무엇도 아닌 글쓰기를 통해 서서히, 그리고 끝내 돌파해왔다.
그렇기에 이번 책에서 최은영이 자신이 ‘죽거나 되살아나는’ 순간을 글쓰기와 연결해서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최은영은 오랫동안 데뷔하지 못했던 시기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꿈을 꿨는데 길몽인 것 같다면서 백원을 주고 사라고 했다. 내가 죽는 꿈이었다.”(37쪽) 그리고 짧지 않은 시간 글을 쓰지 못하다가 마침내 장편소설 『밝은 밤』을 완성한 순간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밝은 밤』을 쓰면서 작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소생했다.”(41~42쪽) 『백지 앞에서』가 극적인 모험담인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스펙터클함이 있다면, 그것은 글쓰기로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고 삶의 영역을 넓혀온 작가의 안간힘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다.
최은영은 이번 책을 준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세이에서 독자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인간인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타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는 기분을 느낀다”(10쪽)고.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고 난 우리도 그 어느 때보다 최은영 작가가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의 밝은 면모만 취하는 게 아니라 그의 어두움, 슬픔, 고통 또한 함께 받아들이는 과정임을. 그런 관계의 본질을 『백지 앞에서』는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의 담백한 담담함으로 보여준다. 누군가의 사적인 고백이 다른 누군가를 일으켜세울 수도 있다는 것은 새로운 진실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대의 가장 깊숙한 바닥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들여다본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최은영만의 놀라운 힘일 것이다.
작가 소개
최은영
2013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장편소설 『밝은 밤』, 짧은 소설 『애쓰지 않아도』가 있다.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이해조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만중문학상, 제5회, 제8회,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목 차
프롤로그│버려진 일기장에게 … 007
백지 앞에서 … 021
당신이 더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분 … 051
긴 겨울 … 067
천천히 달리기 … 099
혼자 사는 연습 … 135
못생겼다는 느낌 … 159
그때의 은희들에게 … 181
174517 … 201
그날 이후 … 227
인간과 동물 사이 … 249
에필로그│나의 거의 모든 것 … 269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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