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편집자의 책소개
난다의 >걸어본다< 뮌스터
허수경 에세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은 잊어버릴 수 없어.
우리가 잊어버릴 수 없는 이유는 마음속에서 서로 자주 지나다녔기 때문이야.”
당신과 나와 시詩, 그리고 뮌스터!
난다의 걸어본다 그 다섯번째 이야기. 시인 허수경이 독일로 이주하여 23년째 살고 있는 뮌스터를 배경으로 그네가 천천히 걷고 깊숙이 들여다본 그곳만의 사람들과 그곳만의 시간들을 독일 시인들의 시와 엮어 소개하고 있다. 예컨대 매 챕터마다 그네가 번역한 독일 시인들의 시가 한 편씩 실려 있는데, 이는 그네가 알고 있고 알게 된 독일만의, 뮌스터만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꽤 요긴하게 쓰인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같은 시인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등의 낯선 이름도 그네를 따라 발음해보게 된다. 그러나 시인의 유명세를 따져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 그네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들의 시가 좁게는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되어 ‘도시’로 성장해가며 오늘날 인구 삼십만 명을 이룬 뮌스터를 테마로 삼고 있는데다 크게는 참혹한 전쟁을 겪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주요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는 독일과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었다. 안으로야 어떤 변모를 앓고 있었을지 모르나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독일이 벽을 깨부수는 동안 한국이 철조망을 조여놓는 동안 한국, 그것도 진주라는 소도시의 한 시인이 독일, 그것도 뮌스터라는 소도시로 학생이 되어 떠났다. 1992년, 시를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은 그네가 머잖아 돌아올 거라고, 그네는 한국을 떠나서는 못 사는 여인이라고, 특히나 우리말로 시 다루는 데는 타고났고, 우리 음식이라면 뭐든 척척 다 잘해내는데다 무엇보다 우리네 모든 글쟁이들을 무조건 덮어놓고 사랑하는 그네가 어떻게 독일 여인이 될 수 있겠냐며 돌아올 거라고, 그것도 일찌감치 다 때려치우고 금세 돌아오고 말 거라 했다지만 그네는 23년째 한국을 떠나 아직도 그곳에 있다. 몇 년을 더 보태면 인생의 절반가량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 된다. 지금 소개하려는 이 책은 어쩌면 그런 그네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열쇠구멍 혹은 바늘구멍 정도나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분명하게 알 수 있던 건 그네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곳이 여전히 한국이며, 독일 곳곳을 홀로 걷고 있으나 텅 빈 그네의 옆구리 대신 그네 마음은 여전히 그네만의 ‘당신’으로 꽉 차 있었다는 사실 정도랄까.
『너 없이 걸었다』는 한 권의 에세이로 지칭되고 있지만 동시에 시집이자 역사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일이라는 나라를 다룬 독일만의 총체적인 문화백과사전이다.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를 객관적으로 설명해내는 데 있어 그 사유는 깊고 그 문장은 미려하다. 새로 산 하이힐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조심스럽고 단정하기보다 오래 신고 적당히 닳은 운동화 신은 발로 걷는 걸음처럼 유연하면서도 자유롭다. 그럼에도 늘 하고자 하는 말의 축과 의지의 깃대를 찾을 줄 알고 흔들 줄 안다. “유혹하는 로렐라이. 시는 유혹하는 어지러운 글”이라고 했던가. 그럼에도 그네를 아름다운 나그네로 칭할 수 있는 데는 그네만의 사람됨을 우리가 익히 알기도 하는 연유다. 그네는 말하지 않았던가. “따뜻한 인간은 언제나 따뜻하게 닿는 거, 이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의 기반이지요”라고.
총 열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번 책에서 도저히 밑줄을 긋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한 대목들이 매 페이지마다 눈에 띠는데 이는 이방인으로, 점점 우리말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리말을 고파하고 우리말의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그네의 고독이 빈번히 들키기도 하는 까닭이다. 그네는 “낯섦을 견뎌내는 길은 걷는 것 말고는 없었다”고 했다. “고독에는 대가가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네를 버티게 해준 건 무엇보다 ‘시’가 있어서라는 고백을 서두부터 서슴지 않고 해댔다. 그곳까지 가서 시라니, 그곳에서마저 시라니, “시를 통하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한 풍경들. 그냥 그렇게 스쳐가는 이방의 순간들. 시들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이 갑자기 가슴에 먹먹하게 차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는 천생 시인 허수경.
이 책은 우리에게 ‘인간’을 묻고 ‘삶’을 묻고 ‘별’을 묻고 ‘존재’를 묻고 ‘상처’를 묻고 ‘죽음’을 묻는다. 그네가 그네에게 던지는 자문인데 반복에 반복을 거듭할수록 읽어나가는 우리에게는 질문에 질문이 된다.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네의 질문.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그대들이 있어서 조금은 특별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었다, 는 멜로디를” 흥얼거릴 줄 아는 그네. 사는 게 추하다 할지라도 시가 있어 ‘위로’를 배운다는 그네. 그런 그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끝났지만 사랑은 또한 계속될 수 있을 거란 데서 희망을 배우게 하고, 사랑이 끝났으니 사랑했던 그 사람을 더는 볼 수 없음으로 절망을 배우게 한다. “그는 ‘너’를 발견했다. 그러자 그만이 쓸 수 있는 시들이 쓰이기 시작했다. 사랑은 그에게 언어를 주었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그네에게 ‘사랑’은 이렇게나 ‘시’로 다다. ‘시’로 전부 다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우리가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위로할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도시들은 우리를 안아주지 않았던가. 뮌스터는 그대 없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다. 그 도시를 그대 없이 참 오랫동안 걸어왔다. 모든 평범한 이 세계의 도시, 혹은 저 하늘의 별들이 걷는 것처럼. —p33
너를 생각하면서 걷는다. 너는 언젠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부재중. 나는 너에게로 가고 너는 나에게로 온다. 이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향하고 있는 것, 내가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 —p76
또 한편으로 “대충 잡아 열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에 당신은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가까운 곳에 우리는 있다”라고 말하는 그네이기에 이 책에 담긴 한국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바로 지금의 이야기라 할 수 있음을 안다. 물리적 시간적 제약은 있으나 우리의 한 시대를 한 세대를 실시간으로 함께 살아내면서 그네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자 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치유방법이 없을까 늘 두리번거리는 또 한 명의 품성 넉넉한 대모를 자처해왔다. 어쩔 수가 없다. 그네의 눈에는 그 수가 보일 수도 있는 탓이렷다.
희생된 이들에게 잊히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잊음을 독촉하는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인간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 짐승은 인간을 다시 억울한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담함을 주장하고 관철하려고 한다. 잊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이다.—p91~92
우리는 잊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뭔가를 철저하게 잊음으로 사라지게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반복되는 맹세는 얼마나 쉽게 우리가 잊어버리는지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이다.—p171
그네를 이야기하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손’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내민 그네만의 말 또한 손의 일환이기도 하지 않는가. 손은 손을 낳는다는 말은 두 사람이 손을 잡아야만 굴러떨어져 깨어지는 불안한 유리잔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서로의 손을 맞으면서 두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시작되고, 손은 서로 맞잡는 순간, 인간을 인간에게로 다가가게 만든다는 말이 된다.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 또한 손을 잡아주는 일이라는 말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긴다한들 무리는 없지 않을까. 서로에게 서로의 손이 안전하다 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 평화가 아닌가. 이 거리에서 잡아야만 하는 당신의 손, 그 안전함. 그만큼 떨리는 내 손, 그 불안함.
한 인간이 타인의 손을 잘 잡는 일은 사건이다. 일생에 진심으로 우리는 몇몇의 손을 잡았을까.
다만 몇 손.
다만 죽음과 사랑에 닿을 거라는 믿음에서 내민 손.
그 울퉁불퉁한 노동으로 미워진 손.
타인의 손을 끌어안고 차가운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있는 이들은 이 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리라. —p176
아직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너에게로 가지 못할 이유가, 내 속을 다 걸어보지 못한 이유가 있다는 그네의 이야기를 우린 아무래도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듯하다. 아니 그래야 알 듯하다. 그네만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그 진심을.
작가 소개
허수경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 『박하』, 동화책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파울 첼란 전집』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3일 뮌스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고 산문으로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오늘의 착각』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 유고 시집으로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이 출간됐다.
목 차
prologue
1│어느 우연의 도시
2│기차역에서
3│칠기 박물관 앞에서
4│뮌스터의 푸른 반지
5│츠빙어Zwinger에서
6│소금길, 그리고 다른 길들─멀고도 가까운 전쟁•
8│중앙시장과 옛 시청
9│대성당과 그 주변
10│루드게리 거리와 쾨니히 거리에서
11│뮌스터아 강을 따라서 걷기 1
12│뮌스터아 강을 따라서 걷기 2
13│아호수에서
14│쿠피어텔에서 프라우엔 거리
epilogue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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